코리아컵 국제축구대회 (Koreacu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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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축구협회에서 축구를 통한 아시아 각국의 우호와 친선을 위해 개최하는 경기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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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대한축구협회에서 축구를 통한 아시아 각국의 우호와 친선을 위해 개최하는 경기대회.
연혁

대한축구협회는 축구를 통한 아시아 각국의 우호와 친선, 축구 기량 향상을 위해 1971년 5월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호칭을 따 ‘박대통령배쟁탈아시아축구대회’를 창설하였는데, 이 대회는 한국이 주최한 최초의 국제 축구대회로, 흔히 ‘박스컵(Park’s Cup)’으로 불리었다. 이것이 ‘코리아컵국제축구대회’의 전신이다.

이 대회는 1970년 방콕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안게임에서 한국 축구가 우승한 직후 장덕진(張德鎭) 대한축구협회장이 “아시아 규모의 국제 축구대회를 한국에서 해마다 개최하겠다”고 밝힘으로써 구체화되어,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하사한 우승컵을 내걸고 1971년 5월 2일 제1회 ‘박대통령배쟁탈아시아축구대회’를 비로소 개최하게 되었다.

1971년 제1회 대회를 시작으로 1975년 제5회 대회까지는 참가국이 아시아권 국가로 한정되었지만 1976년 제6회 대회부터 브라질, 네덜란드 등 남미와 유럽 국가도 참가하는 범세계적인 대회로 성장했다. 이에 따라 대회명칭도 ‘박대통령컵쟁탈국제축구대회’로 바뀌었다.

1977년 제7회 대회부터는 전국적인 축구붐 조성을 위해 경기장소를 서울에서 전국으로 확대, 순회경기로 개최되기 시작했다. 이는 국내 축구의 저변 확대뿐만 아니라 외국 참가선수들에게 한국을 더 깊이 인식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서였다.

1980년 제10회 대회부터는 명칭을 ‘대통령컵국제축구대회’로 변경하였다. 서울에서 아시안게임이 열린 1986년을 제외하고는 1989년 제18회 대회까지는 매년 개최하였으나 월드컵축구대회 · 올림픽 등 대형 국제대회와의 중복을 피하고 내실 있는 대회 운영을 위해 이후에는 2년에 한 번씩 홀수 해에 개최키로 하였으며, 1991년 제19회 대회가 열렸다.

1995년에는 정치적인 색깔을 배제하고 권위 있는 국제대회로 새로 태어나기 위해 국제화 추세에 맞게 대회명칭을 ‘코리아컵국제축구대회’로 변경하여, 제1회 대회를 새로 시작하였다.

1997년 제2회 코리아컵 대회부터는 대회 수준의 향상을 위해 세계 대륙을 대표하는 각국 국가대표 4개 팀으로 참가팀을 엄선하여 초청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최고의 수준과 권위를 가진 국제축구대회로 부상하였다.

대한축구협회는 1999년 대통령배국제축구대회를 계승하는 차원에서 ‘코리아 프레지던트컵’으로 명칭변경을 고려했으나 ‘국민의 정부’에서 프레지던트란 이름을 추가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다는 여론에 따라 대회이름을 그대로 사용하며, 대회 사상 처음 ‘베르나-코리아컵 국제축구대회’라는 타이틀 스폰서명을 붙였다.

성과

1971년 제1회 대회는 8개국이 참가했다. 한국과 미얀마 (지금의 미얀마)가 결승에 올라 연장전 끝에 0-0 무승부를 이루자 이틀 뒤 2차 결승전을 벌였다. 이 경기에서도 0-0으로 승부를 가리지 못하자 공동우승으로 처리했다.

1972년 제2회 대회도 아시아지역 8개국이 출전, 버마가 2연속 우승을 차지했다. 한국은 준결승에서 우승팀 버마에게 0-1로 패해 3위에 그쳤다. 준우승팀 인도네시아는 필리핀을 12-0으로 대파, 역대대회 최대 골차로 승리하는 기록을 남겼다.

1973년 제3회 대회는 6개국이 출전하여 버마와 크메르(지금의 캄보디아)가 공동 우승을 차지했다. 크메르로서는 국제대회 최초의 우승이자 마지막 우승이었다. 한국은 제2회 대회에 이어 버마에게 준결승에서 0-1로 패해 역시 3위에 머물렀다.

1974년 제4회 대회는 일본이 처음으로 참가했다. 8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한국은 결승전에서 인도네시아를 7-1로 누르고 처음으로 첫 단독우승을 차지했다. 7-1은 결승전 사상 최대 스코어였다.

1975년 제5회 대회는 이란 · 레바논 등 중동 국가가 처음으로 참가했다. 한국이 결승에서 버마를 1-0으로 누르고 2년 연속 우승을 차지했다.

1976년 제6회 대회는 브라질 상 파울루 선발팀이 아시아지역 외 국가에서 처음으로 출전했다. 한국은 대표 1진인 화랑과 2진인 충무가 출전했다. 차범근(車範根)은 말레이시아와의 개막전에서 1-4로 뒤진 후반 38분부터 7분 동안 3골을 몰아넣어 4-4 무승부를 이루게 했다. 한국과 상파울루 선발이 결승전에서 0-0 무승부로 공동우승했다.

1977년 제7회 대회는 8개 팀이 출전했다. 한국 A팀과 브라질 상 파울루 선발팀이 다시 결승에서 맞대결하여 상 파울루 선발이 한국 A팀을 1-0으로 꺾고 우승컵을 안았다.

1978년 제8회 대회는 모로코가 아프리카 대표로 참가하는 등 출전국이 세계 각 대륙 14개 팀으로 크게 늘었다. 한국 대표 1진인 화랑이 결승에서 미국 프로팀 워싱턴 디플로매츠에 6-2로 승리했다.

1979년 제9회 대회는 10개 팀이 참가했다. 한국의 화랑은 브라질의 프로팀 빅토리아와 맞섰으나 1-2로 패해 준우승에 머물렀다. 대표 2진인 충무는 3위를 차지했다.

1980년 제10회 대회는 국내정치 상황으로 대회 개최에 난항을 겪다가 아시아 6개 팀만으로 어렵게 치러졌다. 한국이 결승에서 인도네시아를 2-0으로 누르고 우승을 차지했으나 역대 대회 가운데 가장 수준이 낮은 대회로 기록됐다.

1981년 제11회 대회는 브라질 · 아르헨티나 · 우루과이 등 남미의 1급 프로팀 등 12개 팀이 참가하여 대회 수준이 격상되엇다. 한국과 아르헨티나의 코르도바가 결승에서 대결을 펼쳤다. 연장전을 벌이고도 2-2로 승부를 가지지 못해 공동우승으로 처리했다.

1982년 제12회 대회는 한국 대표팀 외에 국내 유일의 프로팀 할렐루야가 단일팀으로 참가했으며 허정무(許禎茂)가 소속한 네덜란드의 PSV 아인트호벤이 출전했다. 한국과 브라질의 오페라리오가 우승을 다퉜으나 0-0으로 무승부를 이뤄 공동우승이 됐다.

1983년 제13회 대회는 11개국이 참가했다. 한국은 대표팀 외에도 프로팀 유공(현 부천SK)이 참가했다. 네덜란드 PSV 아인트호벤이 2년 연속 출전하여 한국을 3-2로 누르고 유럽팀으로는 처음 우승을 차지했다.

1984년 제14회 대회는 8개 팀이 참가했다. 차범근(車範根)이 소속한 독일의 바이에르 레버쿠젠이 참가했으나, 준결승에 오르지 못했다. 우승은 결승에서 할렐루야를 이긴 브라질의 방구 아틀레티코에게 돌아갔다.

1985년 제15회 대회는 15개 팀이 참가했다. 대회 사상 처음으로 한국 월드컵대표팀과 88대표팀이 결승전에 진출하여 월드컵팀이 1-0으로 승리한 끝에 우승을 차지했다.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으로 2년 만인 1987년에 열린 제16회 대회는 12개 팀이 참가했다. 6월 10일 마산에서 열린 한국-이집트 경기중 6월 항쟁 시위로 최루탄 가스가 운동장으로 날아들어 경기가 중단되었고, 마침내 무승부로 처리되는 사태를 빚었다. 한국이 호주와 결승에서 승부차기 5-4로 승리한 끝에 우승을 차지했다.

1988년 제17회 대회는 머잖아 서울에서 개최될 제24회 올림픽의 리허설대회로 치러졌다. 체코 · 소련 등 공산권 국가가 처음으로 참가했으며 참가 16개국이 올림픽과 같은 방식으로 대회를 진행했다. 체코 대표팀이 결승전에서 소련 대표 2진을 누르고 첫 우승을 했으며 한국 대표팀 박종환(朴鍾煥) 감독은 준결승에서 체코에 패한 뒤 돌연 사퇴를 발표했다.

1989년 제18회 대회는 한국의 청룡과 화랑 등 2팀을 비롯한 8개 팀이 출전했다. 체코 대표팀이 덴마크의 프로팀 브론드비를 이기고 대회 2연패에 성공했다. 이회택(李會澤) 감독이 대표 1진과 2진을 통괄 지휘한 한국은 청룡이 3위를 차지했다.

1991년 제19회 대회는 격년제로 치르기로 한 첫 대회로서 8개국이 참가했다. 한국은 결승에서 이집트를 2-0으로 이기고 4년 만에 우승을 차지했다.

1993년 제20회 대회는 한국과 이집트가 결승에서 재격돌했다. 이번에는 이집트가 1-0으로 승리하여 대회 첫 우승의 감격을 안았다.

1995년 제21회 대회는 대회명칭을 코리아컵 국제축구대회로 변경하여 개최하는 제1회 원년대회였다. 8개 팀이 참가했다. 한국이 준결승에서 잠비아에게 2-3의 충격의 패배를 당했다. 에콰도르는 결승에서 잠비아를 누르고 우승했다.

1997년 제2회 코리아컵 국제축구대회는 참가국을 4개국으로 줄이는 대신 각국의 국가대표만을 초청했다. 한국이 4개국 풀리그로 진행된 이 재회에서 유고를 누르고 우승했다.

1999년 제3회 코리아컵 국제축구대회는 크로아티아 · 멕시코 · 이집트 · 한국 등 4개국이 참가하여 풀리그로 우승팀을 가렸다. 크로아티아가 우승, 멕시코가 준우승, 한국이 3위를 차지했다.

의의

코리아컵 국제축구대회는 대통령컵국제축구대회를 계승한 대회로서 1980년대까지는 아시아권 국제축구대회를 주도했으나, 이후로 아시아권에 주어지는 월드컵 티켓이 늘어나면서 한국이 월드컵을 지속적으로 통과함에 따라 점차로 대회의 위상이 하락하던 나머지 1999년 대회를 끝으로 중단되었다. 그러나 이 대회는 세계 각국의 여러 팀과의 경기를 통하여 한국 축구를 발전시킨 공적이 있으며, 또 한국 축구가 세계 무대로 도약하는 데 이바지한 성과가 적지 않았다.

참고문헌

『한국축구백년사』(대한축구협회,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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