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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식의 이삭을 떨어서 알곡을 거두는 농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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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곡식의 이삭을 떨어서 알곡을 거두는 농사일.
내용

예전에는 집 앞의 너른 마당에서 했기 때문에 마당질이라고도 하였다. 마을에 따라서는 타작마당이라 하여 공용 마당을 따로 마련하였으며, 농사가 많은 집에서도 이를 갖추는 경우가 많았다. 마당에서 곡식의 알갱이를 떨어야 하므로 이를 잘 손질해야 할 필요가 있다.

흔히 마당질을 하기 전 논흙을 파다가 마당에 고루 펴고 판판하게 다진 다음 물을 뿌리고 거적을 덮고 나서 밟아 준다. 이렇게 하면 바닥에 멍석을 깔지 않아도 돌이나 흙 따위가 섞이지 않는다.

경기도 김포에서는 개흙을 덧깔아서 바닥을 높인 다음 두레패를 끌어다가 이 위에서 놀게 하여 바닥을 다졌다. 함경남도 안변에서는 원래 바닥을 두 치쯤 파고 모래가 섞이지 않은 흙으로 메운 다음 물을 뿌려 가면서 골고루 밟아 다졌으며, 바닥이 꾸덕꾸덕할 때 조나 겨를 뿌렸다.

이렇게 하면 완전히 말라도 바닥이 터지는 일이 적으며, 만약 틈이 생겼을 때에는 흙으로 메우고 도리깨로 두드려 다졌다.

이러한 마당은 곱돌처럼 매끈하여 곡식에 흙이나 모래가 섞이는 일이 없다. 농가에서는 마당을 이처럼 소중히 다루므로 비오는 날 이곳에서 어린이가 뛰어놀지 못하도록 막으며, 심지어 개가 다니는 것조차 꺼린다. 마당질은 벼나 보리를 떠는 개상질과 콩·수수 따위의 잡곡을 떠는 도리깨질로 나누어진다.

개상은 굵기가 10∼15㎝ 되는 소나무 서너 개를 10여㎝ 간격으로 나란히 묶고, 바닥 네 귀에 50∼60㎝ 높이의 발을 붙인 기구인데, 곡식단을 태질하여 알갱이를 떨어낸다. 또한 돌태라고 하여 나무 대신 돌을 비스듬히 세워 쓰기도 하나, 절구를 가로로 뉘어 놓고 개상을 대신할 때도 많다.

개상질할 때 곡식단을 단단하게 죄어 묶는 끈이 탯자리개인데, 가운데는 새끼로 세 겹 드리며 양끝은 손에 쥐기 쉽도록 머리처럼 땋았다.

개상질은 도리깨질과 더불어 품앗이로 하는 것이 보통이며, 한 사람이 하루 벼 두 가마쯤 떨 수 있었다. 개상질이 끝난 뒤 모닥불을 피워 놓고 옷을 벗어 털어서 까끄라기를 태워 없앴다. 그리고 얼굴에 붙은 것은 뜨거운 물수건으로 문지르면 잘 떨어졌다. 벼 까끄라기의 길이는 보리보다 짧으나 몹시 따가워서 이것을 떨어내는 것도 큰 일이었다.

개상질을 할 때에는 볏단을 앞뒤로 번갈아 가며 고루 떨지만 떨어지지 않고 남는 낟알이 있다. 이것은 따로 모아 부인들이 타작마당에 둥글게 둘러앉아 뽕나무 가지를 깎아 만든 휘추리로 떨었는데, 이를 ‘짚대떨기’라고 한다. 이때 부인들은 불에 달군 납작한 돌 위에 발을 올려 놓아 얼지 않도록 하였다.

도리깨질로 보리를 떨 때에는 처음 두 단은 이삭끼리 마주 놓으며, 이어서 물고기 비늘처럼 늘어놓는다. 도리깨질은 두 사람이 마주서서 하는 것이 보통이나 세 사람이 모로 서서 치기도 한다.

이때에는 익숙한 사람이 먼저 치고 난 자리를 나머지 사람들이 따라가며 두드리는데, 능숙한 자의 도리깨질을 선도리깨질이라고 한다. 한쪽을 떨고 나서 위치를 바꾸어 서서 옆으로 두들기면 곡식단은 자연히 뒤집어진다. 한 사람이 하루에 보리 세 가마를 떨 수 있다.

도리깨질은 품앗이를 하는 것이 보통이며(도리깨는 각자 자기 것을 가지고 감), 노래를 불러 노동의 괴로움을 덜기도 하는데 앞 소리를 내는 사람을 ‘목도리깨’, 뒤따라 부르는 사람들을 ‘종도리깨’라고 한다.

다음은 충청남도 예산지방의 노래이다. “에헤야 딱딱·에헤야 딱딱·물러가 섬사넘기·들어가 꼴대넘기·가른 갈겨라·모도 갈겨라·지덕 영감 차렐세·호박 영감 물러가·우줄우줄 나오세·호박 영감 차렐세·에헤야 딱딱·에헤야 딱딱.”

개상질이나 도리깨질이 끝나면 곡물을 한 곳에 모으고 나비질을 하여 까끄라기와 북더기를 날린다. 넉가래에 줄을 매어 가래질하듯 곡식을 떠서 멀리 날리면 제각기 키를 들고 섰던 일꾼들이 이를 부지런히 부치는데 무거운 나락은 가까이 떨어지고, 가벼운 쭉정이나 북더기는 멀리 날아간다.

나비질을 마치고 벼를 말로 되어 섬에 담는 일을 마질이라고 한다. 예전에는 키 대신 부뚜로 바람을 일으켰으며, 뒤에 풍구·바람개비가 나와서 능률을 올렸다. 곡식을 떠는 데에도 개상 대신 그네를 쓰게 되고 이어 탈곡기가 등장하였다. 오늘날에는 콤바인으로 곡식을 베어낸 그 자리에서 떨어 가마니 따위에 바로 갈무리한다.

참고문헌

『한국민요집』 Ⅰ(임동권, 동국문화사, 1961)
『한국의 농기구』(김광언, 문화재관리국, 1969)
『한국민속대관』 5(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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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김광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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