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명나라의 원병인 수군도독 진린(陳磷)과 그 부하인 부총병(副摠兵) 등자룡(鄧子龍)이 이 섬에 유진할 때 촉한명장 관우(關羽)의 신력을 빌려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자 관왕묘를 지어서 관우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지낸 것이 시초가 된다.
그 뒤 1666년(현종 7) 전라우수사 유비연(柳斐然)이 중수한 뒤 옥천사(玉泉寺)의 승려를 시켜 수호하게 하였고, 조정에 청하여 묘정에 서무(西廡)를 짓고 진린과 이순신(李舜臣)을 추배하였다.
1684년(숙종 10) 전라도관찰사 이이명(李頤命)이 묘무(廟廡)를 중수한 뒤 처음 사액을 청하였고, 그 뒤 이순신의 증손 광보(光輔)가 수군절도우후(水軍節度虞候)가 되어 이 섬에 부임하자 묘정비문을 지어서 비석을 세웠다.
1763년(숙종 39)에 영상 이이명의 소로 ‘탄보묘(誕報廟)’라 어필 사액한 뒤부터 탄보묘라 부른다. 1792년(정조 16) 당시 등자룡을 왕명으로 배향하고 관원을 보내 제사를 지내면서 국난에 기여해준 공을 치하였다.
등자룡은 당시 70세가 된 노장이었으나 200여명의 용사를 이끌고 싸우다가 이순신이 위험에 빠지자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그 배에 뛰어들어 용감히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1832년(순조 32) 다시 관원을 보내 치제하였고, 탄보묘에 조복을 갖추어둔 뒤 조관이 그 섬에 공사간의 일로 갔을 때 직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알묘의 예를 행하도록 왕명으로 지시하였다. 1837년(헌종 3)에도 관원을 보내 제사를 지낸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