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 자신이 친서하여 이를 비에 새겨 성균관의 반수교(泮水橋) 위에 세운 것이다. 영조는 왕세제시절에 당쟁의 폐해를 직접 경험하였기 때문에 즉위하자마자 당쟁의 조정에 힘을 기울였다. 1725년(영조 1) 1월 당쟁의 폐를 통언(痛言)하면서 붕당을 조성하는 자는 종신토록 금고(禁錮)하여 국정에 참여시키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표명하였다.
1727년에는 노론의 장기집권에서 오는 폐단을 제거하고자 노론의 강경파를 출척(黜斥)하고 소론을 등용하였으며, 또 양파의 조정에 유의하여 노론의 영수와 소론의 영수를 친히 불러 융화를 주선하였다. 이어 왕은 각 파의 온건론자를 등용하여 탕평책을 펼쳐나갔다.
탕평책의 하나로 청요직의 자리에 각 파의 인물을 균형있게 등용하여 서로 견제하게 하였다. 이렇게 정책을 펼쳐나가자 어느 정도 탕평정국을 이루었다. 이후 정계에서 밀려난 남인·소북 등의 인물도 등용하게 되었으며, 심지어는 당파에 상관없이 인재 등용도 가능하게 되었다.
그 결과 1742년에는 관학의 최고학부인 성균관의 반수교 위에 탕평비를 세워 유생들에게 서로 편을 나누지 않고 당을 나누지 않아야 한다는 내용을 알리게 하였다.
영조는 『논어』 위정편 14장에 있는 구절인 “군자는 두루 원만하고 편향되지 않으며, 소인은 편향되고 두루 원만하지 못하다(君子周而不比 小人比而不周)”를 활용하여 “두루 원만하고 편향되지 않음이 군자의 마음이고, 편향되고 원만하지 못함이 소인의 사사로운 마음이다(周而弗比 乃君子之公心 比而弗周 寔小人之私意.)”라고 재구성하여 친서하고 비에 새겨 성균관에 세웠다. 현재 이 비는 성균관대학교 내에 보관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