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차례에 걸쳐 간행되어 여러 종류의 중간본이 남아 있으며, 판본도 목판본과 필사본이 있다.
선조대에 유희춘(柳希春)의 건의에 따라 정부에서 간행하려고 했으나 임진왜란이 일어나 중단되었다.
그 뒤 문인 조목(趙穆) 등이 1599년(선조 32)에 간행하기 시작해 이황이 죽은 지 30년이 되는 이듬해 1600년에 원집(原集) 49권, 별집(別集) 1권, 외집(外集) 1권 등 모두 51권 31책으로 간행하였다. 이것이 경자본(庚子本)으로 불리는 『퇴계문집』 초간본으로 목판본이다.
이후에 문인 유성룡(柳成龍)이 『퇴계선생연보』 3권 및 부록 1권을 편찬해 경자본에 추가하였다. 1746년(영조 22) 6대손 수연(守淵)이 경자본에 수록되지 못한 유고를 수집해 『퇴계선생속집』 8권 4책을 편찬하였다.
1793년(정조 17)에는 권두경(權斗經)이 편찬한 『퇴계언행통록(退溪言行通錄)』 8권을 도산서원(陶山書院)에서 개정해 『퇴계선생언행록』 6권으로 간행하였다.
1869년(고종 6) 후손 휘부(彙溥)·휘재(彙載)·만호(晩浩)·만각(晩慤) 등과 유생 40여명이 도산서원에 모여 중간본을 내되 『주자대전』의 체재를 따르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들은 당시 도산서원에 보관중인 책을 열람해 최초본인 『퇴도집(退陶集)』 20책, 중본(中本)인 『퇴계선생집』 40책, 경자본의 정본(定本)으로 간행할 때 대본이 되었던 『퇴계선생문집』 30책, 『퇴계선생수간(退溪先生手簡)』 2책, 『선생문집초본』 1책, 『문집초본』 1책, 『퇴계선생집습유』 12책 등 모두 105책을 초본과 대조해 불필요한 부분을 뺀 뒤 유생에게 베껴 쓰게 하고, 휘부가 더 수집한 유고를 합해 모두 97권 75책으로 편찬해 번남가숙(樊南家塾)에 수장하였다.
이것이 번남본(樊南本)으로 불리는 『도산전서(陶山全書)』로서 필사본이다. 원집 66권 49책, 외집 1권 1책, 별집 2권 2책, 속집 8권 6책, 유집(遺集) 20권 17책으로 구성되었으며, 내제는 ‘퇴계선생전서(退溪先生全書)’이다.
그러나 이 책은 완성된 것이 아니어서, 특히 유집의 경우에는 그 목록과 실제 수록된 내용이 다른 부분이 많고, 편찬 원칙을 밝힌 범례에는 부록에 「언행통록(言行通錄)」·「연보」 등을 수록한다고 되어 있으나, 실제 한편의 글도 수집되어 있지 않다. 또한, 시문에 중점을 두어 다른 저술은 소홀히 취급된 한계가 있다.
그 뒤 1910년 이후에 후손이 번남본을 대본으로 재정리하고 유집을 보충해 원집 66권 27책, 속집 8권 3책, 별집 1권 1책, 외집 1권 1책, 유집 20권 7책 등 모두 96권 39책으로 된 『도산전서』를 편찬해 도산서원의 상계(上溪) 광명실(光明室)에 보관했는데, 이것이 상계본(上溪本)이다. 그런데 1950년 6·25전쟁 때 몇 책이 없어졌다.
앞에서 지적한 문제점을 지니고 있지만, 여러 종류의 판본 가운데 수록된 내용이 가장 많고 전질이 모두 남아 있는 번남본을 중심으로 그 체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총목록과 당시 전하지 않는 글의 목록인 일목록(逸目錄)이 각각 1책씩 있다. 원집은 권1∼5에 시, 권6에 교(敎)·소(疏), 권7에 차(箚)·경연강의(經筵講義)·계의(啓議), 권8에 사장(辭狀)·계사(啓辭)·서계수답(書契修答), 권9∼57에 서(書), 권58에 잡저, 권59에 서(序)·기(記), 권60에 발(跋), 권61에 잠명(箴銘)·표전(表箋)·상량문, 권62에 축문·제문, 권63·64에 묘갈지명(墓碣誌銘), 권65·66에 행장이 수록되었다.
외집·별집은 앞에 목록이 있고, 모두 시가 수록되었다. 속집은 목록이 있고 권1·2에 시, 권3∼7에 서(書), 권8에 서(序)·발·갈명(碣銘)·잡저가 수록되었다.
유집은 내편과 외편으로 나누어져 있다. 내편은 앞에 범례와 목록이 있고, 권1에 가사(歌辭)·시·서(書), 권2∼9에 서(書), 권10에 잡저·축문·행략(行略)이 수록되었고, 외편은 권1에 가사·부(賦)·시, 권2∼6에 서(書), 권7에 책(策)·잡저·갈명·지(識)·사실(事實)·기·후(後), 권8∼10에 잡저가 수록되었다.
이황은 본래 도연명(陶淵明)과 두보(杜甫)의 시를 좋아하다가 말년에 주희(朱熹)의 시에 심취했다고 한다. 그는 깊이 있고 맑으며 장중하고 원숙미를 풍기는 시를 많이 지었다.
「매화시부도산십이곡(梅花詩附陶山十二曲)」은 매화를 읊은 시들과 도산서원이 있는 안동의 산수를 예찬한 연작시조 12편이다. 이 시를 저자 자신의 필적으로 모각(模刻)한 것이 현재 남아 있다.
문집의 태반을 차지하는 서한문은 문장이 훌륭해, 그 중 일부를 골라 『퇴계서절요(退溪書節要)』를 편찬하였다.
잡저 가운데 중요한 것을 몇 가지 골라 그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천명도설(天命圖說)」은 같은 시기의 유학자 정지운(鄭之雲)의 「천명구도(天命舊圖)」를 개정(改訂)해 인간과 사물이 모두 이(理)와 기(氣)가 묘응(妙凝)하는 데서 성립한다는 독창적인 존재론을 전개하고, 『태극도설(太極圖說)』의 인설(因說)을 일체의 것이 이와 기가 대치하는 데서 존립한다는 대설(對說)로 변혁시킨 논저이다.
「심경석의(心經釋疑)」는 문인 이덕홍(李德弘) 등이 저자의 『심경』에 대한 강의 내용을 기록한 것을 정정한 글이다. 「심경후론(心經後論)」은 심학(心學)의 연원을 밝히고, 독자적인 정주학적 심학(程朱學的心學)의 관점에서 이단사설을 비판한 글이다.
『성학십도(聖學十圖)』는 군주는 사단(四端)의 마음을 확충해 본성을 회복한 성인이 되는 학문인 성학을 돈독히 닦아 그것으로써 정치의 근본을 삼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68세의 나이에 지어 당시 17세의 국왕 선조에게 올린 것이다. 성학에 대한 선학의 도(圖)와 설(說)에 자신의 견해를 덧붙여 유학의 핵심을 10개의 도(圖)로써 정리하였다.
「삼경사서석의(三經四書釋義)」는 삼경과 사서를 간략히 해석한 것이다. 「계몽전의(啓蒙傳疑)」는 『주역』에 대한 연구서이다. 「사단칠정분이기설(四端七情分理氣說)」은 기대승(奇大升)과 8년간 사단칠정을 토론하며 주고받은 서한을 모은 것이다.
「송계원명이학통록(宋季元明理學通錄)」은 본집에 송 말부터 명에 이르기까지의 주자학자의 언행을 기록해 주자학의 실상을 역사적으로 정리하고, 외집에서 육구연(陸九淵)·왕수인(王守仁) 계통의 학문을 비판하였다.
「성리제가해초(性理諸家解抄)」는 성리에 관한 대가의 해석을 초록한 것으로, 필체가 훌륭한 작품이다.
「고경중마방(古鏡重磨方)」은 『대학』에 수록된 탕(湯)의 반명(盤銘)을 비롯해 백거이(白居易)·한유(韓愈)·주희 등의 명(銘)·잡(箴)·찬(贊) 가운데 수양에 도움이 될만한 것을 골라 모은 것이다.
저자의 저술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그 사상을 간략히 살펴보겠다. 원시 유학을 발전시킨 송(宋)의 성리학을 보완해 일체의 것을 이(理)와 기(氣)로 설명하는 이원적 이기철학을 전개하였다.
이는 자연스러우면서도 당연하고 필연적으로 그렇게 되어갈 수 있는 무형(無形)·무적(無跡)의 본원적 조리이고, 기는 응취(凝聚)하여 형질을 이루고 이와는 달리 정의(情義)·계탁(計度)·상량(商量)도 있는 유형(有形)·유적(有跡)의 자의적인 기운이라고 정의하였다.
이러한 이와 기가 서로 대치하면서도 하나로 결합함으로써 인간 및 자연의 일체의 것이 성립한다고 보았다. 이는 인간에게는 인륜으로, 자연에서는 내면적 법칙으로 발현되는데, 이 때 기는 이의 규제를 받는다. 이는 본연의 성(性)이고, 원시유학의 인(仁)에 해당되는 것으로 기보다 우월한 것으로 인식하였다.
이 이를 몸소 익혀 아는 것이 진실로 아는 것, 곧 진지(眞知)인데, 이것과 실천의 관계는 선행후지(先行後知)나 선지후행(先知後行)이 아닐 뿐만 아니라, 지행합일(知行合一)도 아닌 지행병진(知行幷進) 내지 지행호진, 즉 서로 보완하면서 함께 나아가야 할 것으로 보았다.
주희의 존재론이 나타나는 저술인 『태극도설해(太極圖說解)』의 ‘태극생양의(太極生兩儀)’를 해석해, 이것은 태극, 즉 이에서 양의(兩儀), 즉 기가 생겼다는 뜻이 아니라, 이와 기는 처음부터 대대(對待)한 채 통일되어 있다는 뜻이라고 이해하였다.
즉, 근원에서의 이와 기의 대대적 통일이 과정에서의 이기의 대대적 통일로 전화된 것이 우주의 여러 사물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철학은 앞에서 소개한 「천명도설」에 잘 나타나 있다. 이를 관념적인 것으로, 기를 실재적인 것으로 본 이황의 존재론은 관념론·경험론·유심론·유물론 등 여러 설을 종합할 수 있는 관념 실재론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태극이나 천명(天命)은 본시 인간에게 이의 극치인 인극(人極)을 그것에 의탁해 투영한 실재이므로, 저자의 관념실재론은 물질적인 것, 신체적인 것보다는 정신적인 것, 이성적인 것을 중시하는 심신평행론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인간의 진실이 사물의 진상에 연결되는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학문할 때에 인간의 진실인 본심을 존재하게 하고 본성을 함양하는 존양(存養) 공부와, 정처(靜處)에서 존양한 것이 동처(動處)에서 그대로 견지되는가를 살피는 성찰(省察) 공부를 병행할 것을 강조하였다.
「심경석의」·「심경후론」·「자성록(自省錄)」·「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등의 저술을 지은 동기도 여기에 있었다.
또한 학문하는 데 신독(愼獨)·외경(畏敬)·정일집중(精一執中) 등을 가장 효율적이고 구체적인 방안으로 제시하였다. 이런 방법을 통해서만 인간의 본성을 회복해 우주의 섭리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 본성의 회복 가능성은 인성에 희(喜)·노(怒)·애(哀)·구(懼)·애(愛)·오(惡)·욕(欲)의 칠정(七情) 이외에, 본성의 단서가 되는 사단(四端), 즉 측은지심(惻隱之心)·수오지심(羞惡之心)·사양지심(辭讓之心)·시비지심(是非之心)이 부여되어 있다는 점에서 찾았다.
사단의 근원은 인의예지(仁義禮智)로 표현되는 본연의 성이므로, 사람이 사단의 마음을 확충해 간다면, 마음이 사단의 근원인 본성으로 채워져서 본성을 회복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저자의 핵심 사상은 본심(本心)을 보존하고 함양하려는 노력이, 칠정이라는 개인적 선정(善情)과 사단이라는 보편적 선정을 차례로 거쳐서, 가능하면 인간의 기질 가운데 보편적 선정을 확충해 마침내 인간의 본성을 회복하자는 점에 있다고 생각된다.
이 책은 조선 중기에 성리학을 독자적인 학문 체계로 수립하고, 이원적 이기론, 주리론(主理論)을 주창해 후에 영남학파(嶺南學派)의 종주가 되어 사상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은 인물의 저술을 모은 것으로서, 이 시기의 사상사 연구, 특히 성리학의 이해 수준을 연구하는 데 도움이 된다.
국립중앙도서관·규장각도서·장서각도서·안동 도산서원 등에 여러 종의 문집이 전질 또는 일부가 있다. 1915·1916년 조선고서간행회에서 경자본 『퇴계선생문집』·『퇴계선생연보』·『퇴계선생속집』·『퇴계선생언행록』 등을 일괄해 『퇴계전집』으로 출판하였다.
또한 1958년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에서 초간본과 일부 중간본을 대본으로 경자본 『퇴계선생문집』 51권, 이수연의 『퇴계선생속집』 8권, 『퇴도선생자성록(退陶先生自省錄)』·『사서석의(四書釋疑)』·『계몽전의(啓蒙傳疑)』·『송계원명이학통록본집』 11권, 『송계원명이학통록별집』, 유성룡이 작성한 『퇴계선생연보』 6권, 『퇴계선생만제록(退溪先生輓祭錄)』·『도산급문제현록(陶山及門諸賢錄)』 5권, 『교남빈흥록(嶠南賓興錄)』 2권, 『퇴계선생문집고증』 8권 등, 기왕에 간행된 것을 모아 『퇴계전서』 상·하 2책으로 영인하였다.
1971년 위 책에 『삼경석의(三經釋義)』·『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 이익(李瀷)이 편찬한 『이자수어(李子粹語)』 등을 보충해 『증보 퇴계전서』 5책으로 간행하였다.
1975년 일본의 아베[阿部吉雄]가 편찬한 화각본(和刻本)이 『일본각판이퇴계전집(日本刻板李退溪全集)』으로 퇴계학연구원에서 영인되었다.
1980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지금의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번남본 『도산전서』를 4책으로 영인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