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지정면적 1만 2,905㎡. 유적은 문산천(汶山川)의 서쪽에 연이은 해발 82m의 낮은 언덕 위에 분포하고 있다.
이 고인돌군은 서울 인근지역에서 발견된 고인돌군으로서는 강화도 다음가는 대표적인 유적으로 손꼽힌다.
고인돌의 외형은 대부분 작은 규모였다. 능선 위의 제일 높은 위치에 있는 규모가 가장 큰 고인돌은 뚜껑돌[蓋石]이 길이 3.3m, 너비 1.9m, 두께 40㎝나 된다. 고인돌에서 출토, 수습된 유물로는 납작한 돌도끼[扁平單刃石斧] · 양날돌도끼[兩刃石斧] · 숫돌[砥石] · 돌칼조각[石刃片]이 있다.
고인돌 하부에서는 움집터(竪穴住居址)가 발견, 조사되어 생활 유적과 무덤 유적이 함께 하는 중요 유적이 되었다. 이 움집은 동서 길이 15.7m, 남북 너비 3.7m의 매우 길쭉한 평면을 이루고 있음이 특징이며 깊이는 40∼90㎝에 달하였다. 이 움집은 불에 타 벽면에 붉게 탄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움집의 윤곽은 바른 장방형으로 모습이 정연하였다. 네 벽의 벽선을 따라 돌아가면서 바닥에 작은 기둥구멍[小柱孔]이 배열되어 있고, 중앙에서 동쪽으로 치우쳐 화덕자리[爐址] 2개소가 마련되어 있었다. 이처럼 크고 완전한 형태의 선사시대 움집은 우리 나라에서는 최초로 발견되었다.
움집 내부에서는 구멍무늬토기[孔列文土器]의 파편들을 비롯해, 돌칼[磨製石劍] · 돌촉[磨製石鏃] · 돌가락바퀴[石製紡錘車] · 돌도끼[石斧] · 갈돌[碾石] · 숫돌 등이 출토되었다.
움집에서 함께 출토된 목탄편(木炭片)에 대한 방사성탄소연대측정결과, 움집의 연대가 2,950±195B.P., 즉 서기전 7세기경에 해당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로 보아 움집이 고인돌보다 시기적으로 앞서며, 출토, 수습된 유물을 통해볼 때, 청동기시대의 유적으로 판명되었다. 현재 지상에 모습을 보이고 있는 고인돌은 원래는 지상에 거의 넘어져 있던 것을 발굴조사 후 다시 세워 복원해놓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