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준 양기 ( )

표준양기
표준양기
과학기술
개념
부피의 통일을 위하여 표준 혹은 기준이 되도록 만든 용기.
정의
부피의 통일을 위하여 표준 혹은 기준이 되도록 만든 용기.
개설

부피를 측정하는 표준양기는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뿐만 아니라 고려시대의 것도 현재까지 발견된 사례가 없다. 하지만 문헌 자료에 부피를 측정하는 양기를 지칭하는 홉(合)·되(升·刀)·말(抹·斗)·섬(石·苫) 등이 기록되어 있는 점을 고려한다면 다양한 양기의 단위들이 존재하였고, 이들이 표준양기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연원 및 변천

중국은 신(新)의 왕망(王莽) 때 양기의 부피를 기록한 명문이 출토되어서 표준양기의 부피를 알 수 있는데, 1승은 약 200ml 정도이다. 이를 고려한다면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의 1승은 중국 한대(漢代)와 비슷한 약 0.2ℓ 정도로 유추된다.

고려시대의 표준양기는 위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현재까지 단위 양기들이 발견된 사례는 없다. 고려시대의 표준양기의 관계는 1석=15두, 1두=10되, 1되=10홉이었고, 이들 단위의 부피는 추정할 수밖에 없는데, 1053년(문종 7) 내외관의 곡두식(斛斗式)을 정한 것이 주목된다. 이때 제정된 곡두식으로 미곡(米斛)은 길이·넓이·높이가 1척(尺) 2촌(寸)이고, 패조곡(稗租斛)은 각각 1척 4촌 5분(分)이고, 말장곡(末醬斛)은 1척 3촌 9분이고, 대소두곡(大小豆斛)은 각각 1척 9분이었다. 문종 7년의 곡두식은 미곡(米穀)의 석(石:斛)을 기준으로 여타 곡물의 가격을 책정하였다. 이를 통한 표준 승의 부피는 343.19ml(기준척 약 31cm), 즉 약 0.34ℓ이다. 고려시대 1승의 부피는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보다 크게 증대되었음을 알 수 있다.

<표 1>

조선시대 표준양기의 단위는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하면 ‘작(勺:사)·합(合:홉)·승(升:되)·두(斗:말)·석(石:섬)’으로 기록되어 있고, ‘10작(勺)=1합(合), 10합=1승(升), 10승=1두(斗)’는 10진법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반해 두와 석의 관계는 15두=1석(평석)과 20두=1석(전석)이었다.

표준양기의 부피는 『세종실록』에 의하면 1446년(세종 28) "새로운 영조척(營造尺)으로 곡(斛)·두(斗)·승(升)·합(合)의 체제를 다시 정하여 곡(斛)의 용적이 20두인 것은 길이 2척, 너비 1척 1촌 2분, 깊이 1척 7촌 5분으로 용적이 3,920촌이고, 용적이 15두인 것은 길이 2척, 너비 1척, 깊이 1척 4촌 7분으로 용적이 2,940촌이고, 두는 길이 7촌 너비 7촌 깊이 4촌으로 용적이 196촌이고, 승은 길이 4촌 9분, 너비 2촌, 깊이 2촌으로 용적이 19촌 6분이고, 합은 길이 2촌, 너비 7분, 깊이 7촌 4분으로 용적이 1촌 9분 6리가 되게 하소서."라고 하니 이를 따랐다고 기록하고 있다. 세종대의 영조척은 약 30.8cm 정도였다. 이를 통한 표준 양기들의 부피는 다음과 같이 <표 2>로 정리될 수 있다. 실제 세종 28년 이후에 경정된 표준 1승의 부피는 약 0.57ℓ, 즉 0.6ℓ정도일 것으로 추산된다. 이는 오늘날 1승의 부피와 비교하여 볼 때 약 1/3 정도이다.

<표 2> 조선시대 양기(量器)의 부피

반면 조선후기의 표준 양기의 부피는 1740년(영조 16) 비변사에 명하여 경외의 두곡(斗斛)을 교정하게 하였다는 기록을 고려할 때 새롭게 교정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대전회통』에 양기의 부피에 대한 기록은 『경국대전』과 큰 차이가 없다. 따라서 조선후기 표준양기의 부피는 변화가 없었다.

1902년 도량형규칙으로 표준 양기의 부피의 단위와 부피는 조선시대와 달리 전석과 평석을 없애고 석으로 통일하였고, 승을 기준으로 ‘석·두·승·합·작’이었는데, 이를 <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표 3> 부피의 단위

하지만 1905년 3월 21일 ‘도량형규칙’을 법률로 발표할 것을 발의하여 3월 29일 법률 제 1호 ‘도량형법’을 공포하였다. ‘도량형법’은 부피의 경우, 되(升)의 부피를 ‘도량형규칙’의 21,609입방분(立方分)을 64,827입방분으로 바꾸었고, 1석을 150승에서 100승으로 축소하였다. 1승의 부피를 환산하면 1.8039리터가 되었다.

〈표 4〉 1905년〈도량형법〉의 부피 단위

되의 부피가 늘어났기 때문에 이에 따라서 미터법의 부피단위 리터에 대한 비례수치도 함께 커졌다.

현황

표준 양기들은 『삼국사기』를 비롯한 여러 문헌에 홉(合)·되(升·刀)·말(抹·斗)·섬(石·苫) 등이 기록되어 있는 점을 고려할 때 삼국초기부터 사용된 것으로 유추되며, 다만 이러한 양기들이 현재 남아있지 않다. 이러한 현상은 고려시대도 마찬가지이다. 표준 양기는 세종 28년에 의하면 홉·되·말·섬의 크기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 조선초기의 표준 양기의 단위와 부피를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표준 양기의 부피는 조선후기에도 전혀 변화가 없었다.

한말 이후의 표준 양기는 미터법이 도입되면서 단위에는 변화가 없었지만 부피에 큰 변화가 있었다. 이러한 원칙은 오늘날까지도 통용되고 있다.

표준 양기는 부피를 측정하는 도구이다. 이러한 도구들은 『경국대전』에 ‘작(사)·합(홉)·승(되)·두(말)·석(섬)’ 등의 5종류가 기록되어 있지만, 널리 사용되었던 것은 『세종실록』에 기록된 ‘합·승·두·석’이다. '작'은 홉의 1/10이기 때문에 조선시대 부피를 계량화하는데 큰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표준 양기는 홉·되·말·섬 등인데 현재까지 조사된 바에 의하면 조선전기 이전의 것은 거의 남아 있지 않고, 주로 조선후기 이후의 것만 남아있다. 이러한 표준 양기에는 양기의 부정을 막기 위해 관인(官印)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각 모서리에 철심을 박아 형태의 변형을 방지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양기는 국가에서 의도하는 표준화와 달리 다양한 양기들이 민간에서 만들어져 사용되었고, 이로 인해 양기의 부정이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의의와 평가

표준 양기의 1승 부피는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 약 0.2ℓ에서 조선초기 약 0.6ℓ으로 변화되었다. 이는 전근대사회의 사회경제적 발전과 함께 표준 양기의 부피도 변화가 반영되었음을 엿볼 수 있다.

참고문헌

국립민속박물관, 『한국의 도량형』, 1997
박흥수,『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88
이종봉,『한국중세도량형제연구』, 2001
小泉袈裟勝, 『歷史の中の單位』,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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