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진주(晉州). 1402년(태종 2) 무과에 급제하여 사복시부정(司僕寺副正)을 지내고, 상호군이 되었다.
1410년 무과중시에 급제한 뒤 첨지총제(僉知摠制)가 되었으며, 길주도조전지병마사(吉州道助戰知兵馬使)를 거쳐 경원병마사가 되었다. 이듬해 다시 첨지총제가 되었고, 다음해 경성등처병마절제사(鏡城等處兵馬節制使)가 되어 국경을 수비하였다.
1414년 동지총제에 올랐고, 1423년(세종 5) 함길도도절제사를 거쳐 1427년 의정부참찬에 올랐다. 1430년 판좌군도총제부사(判左軍都摠制府事)로 함길도병마절제사를 겸임하였다.
1432년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가 되어 서울에 올라올 때까지 15년간이나 북방의 국경지대를 수비하였는데, 백성을 사랑하고 야인들을 진무하여 변경지방의 경비에 만전을 기하였다.
특히, 1433년 정흠지(鄭欽之)·정초(鄭招)·황보인(皇甫仁) 등과 함께 진서(陣書)를 편찬할 때 총재로 참여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유명한 『계축진설(癸丑陣說)』이다. 이것을 진도(陣圖)와 함께 주인(鑄印)으로 간행하여 군사교육의 교재로 삼았다.
1435년 찬성에 승진하였고, 곧이어 판중추원사를 지냈다. 이듬해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가 있다가 다시 경상도병마도절제사가 되었다. 성품이 너그럽고 활을 잘 쏘았으며, 개국 초기에 국가의 무비(武備)를 위하여 많은 공로를 세워 국가의 기틀을 견고하게 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시호는 양정(襄靖)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