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실록』에 의하면 조선 세종 1년 정월 태종이 변계량(卞季良)에게 명하여 하황은곡(荷皇恩曲)을 짓게 하였는데 장차 사신을 접대하는 자리에 쓰자는 것이었다. 그 서문에 의하면 세종이 부왕의 명을 받들어 국사를 일시 통치하다가 이윽고 황제의 고명(誥命)을 받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즐거움에 넘쳐서 「하황은」을 지었다는 것이다.
『악학궤범』에 보이는 세종시대의 회례연의(會禮宴儀)에 보면 넷째잔(第四爵)을 올릴 때 등가가 「하황은지악」을 아뢰고 문무(文舞)가 들어와 춤을 춘다고 되어 있다. 하황은의 정재는 조선 말기까지 전하였으며 성종시대에는 순 당악만을 사용하였으나 조선시대 말기의 정재홀기에는 주로 「여민락령」과 향당교주(鄕唐交奏)의 반주에 맞추어 연행되었다.
본격의 당악정재가 모두 그렇듯이 봉위의(奉威儀) 18인과 개(蓋) 3인, 죽간자 2인, 족자 1인 이외에 무원으로는 선모(仙母) 1인, 좌·우협무 6인으로 되어 있다.
먼저 봉족자 1인, 봉죽간자 2인이 나와 구호를 부른다. 선모가 좌·우협무 6인과 함께 춤을 추며 나와 서고 다시 선모만 앞으로 나와 서서 다음과 같은 치어를 한다. “하황은은 곧 내려준 황명을 받은 것입니다…….” 선모가 물러나 좌·우협 6인과 함께 악절에 따라 하황은의 사(詞)를 부른다.
다음에 선모가 좌·우협무와 함께 사수무(四手舞)를 춘다. 이어, 세 대열(隊列)을 만들고 선모가 팔수무(八手舞), 북쪽에 있는 두 협무는 마주보며 춤추고 동남과 서남의 네 협무는 북쪽을 향하여 손을 여미며 염수(斂手:두 손을 마주잡고 공손히 서 있음)하고 선다.
선모가 방위를 바꾸면 협무 또한 앞의 무작에 따른다. 죽간자 2인이 족자의 좌우에 나와 갈라서서 구호를 한다. 그 다음 선모가 좌·우협 6인과 함께 앞으로 나아가 염수 족도하고 물러가면 춤이 모두 끝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