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청주(淸州). 호는 노석(老石). 평안북도 영변(寧邊) 출생. 만주 장춘(長春)의 신제미술학교(新帝美術學校)에서 수학하였다.
광복 후 영변에서 중학교 미술 교사를 지내다가 6·25 전쟁 때 남한으로 내려왔다. 1952년 인천공업고등학교 미술 교사를 거쳐 1954년 조선일보사 편집국 사원으로 들어가 신문의 삽화를 그리는 한편, 개인전도 개최하면서 작가적 위상을 굳혔다.
1957년 조선일보사가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의 보수성과 권위에 반기를 들고 김병기(金秉期), 김영주(金永周) 등과 함께 ‘현대작가초대전’을 조직, 주최하였다. 현대작가초대전은 회를 거듭하면서 김창렬, 박서보 등 신세대 화가들이 초대되었고 회화·조각·판화 등을 망라한 미술계에 새바람을 일으켰다. 한봉덕 역시 「환희」, 「백로」, 「교회와 사람과 백로」 등의 추상표현주의 계열의 작품을 출품하였다.
1961년 조선일보사에서 퇴직하기 전부터 현대미술연구소를 개설하여 운영하였다. 1962년에는 신상회(新象會) 창립에 참가하였고 1968년 해체될 때까지 ‘신상회전’에 추상 표현주의 형태로 발전한 작품들을 발표하였다.
1972년 스웨덴의 한 화랑으로부터 초대받아 전시회를 개최한 것을 계기로 1973년부터 스톡홀름에 정착하면서 ‘동양적 신비감의 형상미’라는 평가를 받은 작품 활동을 지속하였다. 그 뒤에도 스톡홀름과 덴마크의 코펜하겐 등지에서 잇따라 개인전을 갖는 한편, 스톡홀름대학 동양학부에 강사로 나가기도 했다. 가족이 모두 스톡홀름으로 이주하여 스웨덴 국적을 취득, 귀화하였다. 이때 먹 글씨용 모필(毛筆)을 이용한 부드럽고 유동적인 표현 효과와 선명한 색상의 조화 및 약동으로 이루어지는 환상적이고 초현실적인 작품을 추구하였다.
1981년 이후 서울에서 일시적인 귀국 작품전을 개최하다가 1990년 무렵부터는 다시 국내에 정착하여, 대작 중심의 열정적 작품 생활로 말년의 예술 의욕을 분출시켰다. 그 내면은 추상적 표현 형상 외에 남녀의 사랑, 자연미, 불교의 신심이 주제로 된 것이었다. 그 화면들은 서법적(書法的)인 운필과 강렬한 생명감의 오색 빛이 충만하는 상징적 형상을 강조한 표현이었다. 1990년에는 파격적인 대작 「한라산」을 장엄하고 신비로운 생명감으로 제작하기도 하였다.
2005년 서울의 제일갤러리에서 ‘한봉덕 화백 추모전’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