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3년(현종 14) 이덕형의 손자 이상정(李象鼎)이 편집·간행하였다. 권두에 1668년 조경(趙絅)이 쓴 서문이 있다. 1869년(고종 6) 후손 이의익(李宜翼) 등이 저자의 연보·묘지·행장·시장(諡狀)·신도비·비지(批旨)·사제문(賜祭文) 등을 수록하여 『한음문고부록(漢陰文稿附錄)』(4권 3책, 활자본, 규장각 도서)을 편찬·간행하였다.
12권 5책. 목판본. 규장각 도서·고려대학교 도서관·성균관대학교 도서관 등에 있다.
권1·2에 시 230수, 권3∼7에 표(表) 1편, 교서(敎書) 2편, 소차(疏箚) 32편, 권8·9에 계사(啓辭) 40편, 정문(呈文) 2편, 권10·11에 간독(簡牘) 90편, 권12에 서(序)·발(跋)·전(傳)·제문 등의 잡저 13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시에는 승려(僧侶)를 대상으로 읊은 40여수가 있는데, 이는 작자가 불교에 친밀감을 가졌다기보다 임진왜란 중에 의승군(義僧軍)이 봉기해 적을 맞아 싸웠거나 또는 축성(築城)에 크게 기여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소차는 대부분 사직소(辭職疏)이다. 「청영묘당양처유병편의차(請令廟堂量處留兵便宜箚)」·「인구언진폐차(因求言陳弊箚)」·「진신정차(陳新政箚)」 등은 시사(時事)나 치책(治策)에 대해 언급한 글들이다. 「진둔촌선조피무사실차(陳遁村先祖被誣事實箚)」에서는 8대조 이집(李集)이 신돈(辛旽)에게 포살(捕殺)될 뻔한 사실과 피무사를 밝혔다.
계사 가운데 「진시무팔조계(陳時務八條啓)」에서는 활민책(活民策), 둔전책(屯田策), 어염 판매책, 방수책(防守策), 군병 훈련책, 병황(兵荒) 후의 내치책(內治策), 관리삭역지폐(官吏數易之弊), 민심 수습 등에 대해 상세히 논하였다. 간독은 90편 가운데 76편이 이항복(李恒福)에게 보낸 것으로 보아 두 사람의 친분관계를 알 수 있다. 그 중에는 왜장 가토(加藤淸正)에게 보낸 편지도 실려 있다.
잡저 가운데 「종계서(宗稧序)」와 「족보서(族譜序)」에서는 광주이씨(廣州李氏)의 돈목을 위해 종계와 족보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회재선생논태극서발(晦齋先生論太極書跋)」에서는 이언적(李彦迪)이 논한 태극서 4편을 높이 평가하였다. 「정기록발(正氣錄跋)」에서는 임진왜란 때 순국한 고경명(高敬命) 삼부자의 충의를 찬양하였다.
「훈제자첩(訓諸子帖)」에서는 주돈이(周敦頤)·정호(程顥)·정이(程頤)·장재(張載)·소옹(邵雍)·주희(朱熹) 등 중국 송나라 성리학자들의 말을 인용하여 자손을 훈계하였다. 「계자문(戒子文)」은 아들 이여벽(李如璧)이 관서 지방에 수령으로 나갈 때 중국 고사를 들어 수령직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처신에 늘 조심할 것을 당부한 내용의 글이다. 「제송운문(祭松雲文)」은 임진왜란 때 의승대장(義僧大將)으로 혁혁한 공을 세웠을 뿐 아니라, 난이 끝난 뒤 일본에 건너가 외교적인 수완을 발휘했던 송운대사의 죽음을 애도하고 그의 공적을 기린 내용의 글이다.
문고의 내용 중에 대부분이 임진왜란과 관련된 것이며, 특히 소차·계사·간독 등은 임진왜란 때의 국내 실정이나 전황, 그리고 대명(對明)·대왜(對倭)관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사료적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