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전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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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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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중반 이후, 토지 소유의 양극화가 진행되어 국가 재정과 민생에 문제점이 발생하자 이익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주장했던 전제 개혁안.
이칭
이칭
명전(名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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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한전론은 17세기 중반 이후 토지 소유의 양극화가 진행되어 국가 재정과 민생에 문제점이 발생하자 이익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주장했던 전제 개혁안이다. 이익은 영업전(永業田)을 설치하여 그 매매를 금지시키는 방식으로, 박지원은 토지 소유 규모 상한을 정하는 방식으로 겸병 확대에 제한을 가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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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7세기 중반 이후, 토지 소유의 양극화가 진행되어 국가 재정과 민생에 문제점이 발생하자 이익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주장했던 전제 개혁안.
내용

16세기 중엽 직전법(職田法)이 해체되면서, 사회적으로 토지 매매가 활발히 이루어졌고 토지의 사적 소유가 크게 늘어났다. 토지 소유는 가파르게 양극화 되어 소수의 지주와 다수의 몰락 농민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 결과 국가는 재정 수입을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고 농민은 생계를 위협 받게 되었다. 이것이 한전론을 비롯한 조선 후기에 토지 개혁 논의가 일어난 사회적 배경이다.

이익(李瀷)(1681~1763)은 전통적 관념인 토지 국유의 원칙 위에서, 전주(田主)는 국가의 토지를 일시적으로 빌려 가지고 있는 것이며 절대적인 소유권을 가진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현실에서는 소수의 사람들이 광대한 경작지를 차지해 부자는 더욱 부유해지고 가난한 자는 더욱 가난해졌다. 이런 까닭에 이익은 토지의 사점(私占)을 원칙적으로 배격하고, 토지에 대한 절대적 처분권 및 관리권은 국가에 귀속시켜야 한다고 하였다.

이익은 전제 개혁의 이상으로 중국 고대의 정전법(井田法)을 생각했지만 그것을 그대로 시행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여 한전론을 주장했다. 이는 국가의 권력으로 강력한 법을 세워 소전주(小田主)들의 몰락을 방지하는 데 그 중점을 두는 것이었다.

한전론은 이미 중국 고대에 역사적인 전거를 가진 제도였다. 전한(前漢)의 동중서(董仲舒, BC 176년? ~ BC 104년)는 ‘한민명전(限民名田)’을 주장했다. ‘명전’은 중국 전한 대 일반인이 소유한 토지를 말한다. 그러므로 ‘한민명전’이란 백성들이 가진 토지의 규모를 제한하자는 뜻이다. 이는 호족들에 의해 확대되는 토지 겸병(土地兼倂)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조선 시대에 ‘명전’은 곧 토지 소유 규모를 제한하는 한전제로 인식되고 그 역사적 전거로 이해되었다. 그리고 정전제에는 못 미쳐도 현실적으로 겸병을 억제할 수 있는 수단으로 인식되었다.

이익이 주장한 한전론의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일정한 기준으로 제한하는 영업전(永業田)을 두자는 것이다. 즉, 국가에서 가(家)에 소요되는 기준량을 작성해 토지 면적을 제한하고 그것으로 1호(戶)의 영업전을 삼게 한다. ② 제한된 영업전을 제외한 전지에 대해서는 무제한 자유 매매를 허락해 어떠한 경우에도 강요하지 않는다. ③ 영업전으로 제한된 전지 내에서 매매하는 자가 있으면 발견되는 대로 산 자는 남의 영업전을 빼앗은 죄로, 판 자는 몰래 판 죄로 다스리고 산 자는 산 값을 논하지 않고 돌려 주어야 한다. 또한 판 자가 자진해 관에 고발하는 경우에는 면죄하는 동시에 그의 전지는 도로 거두어 들인다. ④ 일체의 토지 매매는 관에 보고한 뒤에 이루어지게 하고, 관에서는 전안(田案)을 살펴서 기록한 뒤 문권(文券)을 만들어 주되 관의 인문(印文)이 없는 자는 토지 매매의 법적 보증이 되지 않게 하며 소송도 허락하지 않게 한다.

이와 같은 전제 개혁론은 현실적으로 부귀자(富貴者)의 세력을 무시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한전법에 의해 점진적인 토지 소유의 균형을 꾀하고자 한 것이다. 이렇듯 이익은 급격한 개혁이 아니라 장기간에 걸친 꾸준한 개혁의 추진을 구상하였다.

이익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한원진(韓元震, 1682~1751) 역시 ‘한전책(限田策)’을 제안했다. 겸병을 통한 토지 소유 양극화가 광범위한 사회 현상으로 그만큼 심각했던 것이다. 이익과 당파가 달랐어도 그 역시 당대의 문제에 대해 유사한 대안인 한전론을 제시했던 것이다.

이익보다 56년 뒤에 태어난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은 1799년에 지은 저서 『한민명전의(限民名田議)』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한전제 토지 개혁안을 제시했다.

이익과 박지원 모두 토지 소유 규모에 일정한 제한을 가하여, 겸병으로 인한 양극화를 완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두 사람은 그 제한을 가하는 방식에 차이가 있었다. 이익은 영업전에 대한 매매 금지, 즉 자영농이 자활할 수 있는 최소 단위 경작지인 영업전을 지키는 방식으로 겸병 확대를 제한하려 했다. 반면에 박지원은 토지 소유 규모의 상한을 정하는 방식으로 겸병 확대에 제한을 가하려 했다. 이는 농촌 현실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에 기초한 것이었다.

한편 정약용(丁若鏞)은 한전론이 대토지 소유를 효과적으로 봉쇄하지 못하며, 직접 농사짓는 사람이 땅을 소유한다는 농자득전(農者得田)의 원칙에 어긋나는 것으로 평가했다. 정약용은 한전론의 바탕이 되는 균전론(均田論)에 동의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참고문헌

원전

『경세유표(經世遺表)』
『목민심서(牧民心書)』
『성호사설(星湖僿說)』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논문

김용섭, 「조선후기 토지개혁론의 추이」(『동방학지』 62,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1989)
원재린, 「星湖 李瀷의 國家 改革論과 그 思想的 특질」(『태동고전연구』 26, 한림대학교 태동고전연구소, 2010)
김선희, 「이념의 공(公)에서 실행의 사(私)로: 공사(公私) 관점에서 본 성호 이익의 사회 개혁론」(『한국사상사학』 45, 한국사상사학회,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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