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진창 ()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중추원참의, 조선박람회평의원 등을 역임한 관료. 친일반민족행위자.
이칭
이칭
우려(又黎)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58년(철종 9) 1월 26일
사망 연도
1935년 2월 2일
본관
청주(淸州)
출생지
서울
정의
일제강점기 중추원참의, 조선박람회평의원 등을 역임한 관료. 친일반민족행위자.
개설

1858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가정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1895년 4월 탁지부 참서관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1897년 7월부터 11월까지 탁지부 회계국장을 지냈으며, 1896년 4월부터 8월까지 지방제도조사위원회 위원을 겸했다. 1898년 7월 육군 참령(參領)이 되어 군부대신 관방장보(官房長補)를 지냈다. 1899년 4월부터 6월까지 군법기초위원, 7월 법규교정소 위원을 맡았다. 그 해 12월 육군 부령(副領)으로 진급, 군부대신 관방장관으로 근무했다. 1900년 7월 군법 교정관, 12월 17일 형법 교정관이 되었다.

1904년 8월 내장원경(內藏院卿)에 임명되었으며, 9월 육군 보병 정령(正領)으로 진급해 강원도 순찰사를 지냈다. 1905년 12월 충청남도 관찰사와 12월 충청남도 재판소 판사를 거쳐, 12월 전라북도 관찰사와 12월 전라북도 재판소 판사로 임명되었다. 1906년 9월 경상북도 관찰사로 임명되어, 경상북도 재판소 판사와 경상북도 세무감을 겸했다. 1907년 3월 대동학회 평의원, 3월 중추원 참의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5월 육군 참장(參將)으로 진급하여 군부 협판(協辦)을 맡았으며, 관제 개편으로 6월 직명이 군부차관으로 변경되었다. 1907년 당시 군대가 해산되고 각부 차관이 모두 일본인으로 교체되는 상황이었음에도 1909년까지 차관직을 유지했으며, 1908년 8월 기호흥학회 찬무원(贊務員), 12월 문관보통전형위원장을 겸했다. 1909년 7월 군부와 무관학교가 모두 폐지될 때 예비역으로 편입되었다.

일제강점 이후 11월 자택 내에 직조공장을 설립해 운영했으며, 1921년 1월 김윤식(金允植)을 회장으로 한 금란친목회(金蘭親睦會) 찬성원(贊成員)이 되었으며, 언지사(言志社), 대동시단 등 문필 모임에서도 활동했다. 『매일신보』 ‘매신시단(每申詩壇)’에 여러 차례 한시(漢詩)가 실리는 등 문장이 뛰어났다. 1927년 6월 조선총독의 자문기구인 중추원 참의에 임명되어 1935년 사망할 때까지 두 차례 연임했다. 1929년 5월 조선박람회 평의원이 되었으며, 1932년 12월 나병 예방을 위한 조선나병예방협회를 발기했다. 1933년 7월 중추원 시정연구회 사회부 위원으로 활동했다. 1935년 2월 2일 사망했다. 1907년 11월 대한제국으로부터 훈3등 태극장(太極章), 1928년 11월 일본 정부로부터 대례기념장(大禮記念章)을 받았다.

한진창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9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19: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53∼58)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참고문헌

『고순종실록』
『구한국관보』
『대한제국관원이력서』
『일성록』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Ⅳ-19: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현대문화사, 2009)
『친일인명사전』3(민족문제연구소, 2009)
『매일신보』(1921.1.16.)
『조선인사흥신록』
『조선총독부관보』
집필자
성주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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