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은 한재휘(韓在暉). 함경남도 함주 출생. 카프(KAPF :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 제1차검거사건 이후 계급문예운동에 가담하여 카프 중앙위원을 역임했으며 프로문예비평에 주력하였다.
1930년대 중반에 벌어진 사회주의리얼리즘의 도입을 둘러싼 창작방법논쟁에 김두용(金斗鎔)과 함께 논전을 벌이며 두각을 나타내었다.
그는 김두용·안함광(安含光) 등과 대립하여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도입을 강력하게 주장하면서 세계관에 앞서서 진실을 그리라는 명제를 옹호하였다.
그의 대표적인 평문은 <신창작방법의 재인식을 위하여>(조선중앙일보, 1935.7.23.∼27.)·<문학비평의 신임무>(조선중앙일보, 1935.8.13.∼16.)·<현실인식의 태도와 모랄>(비판, 1935.9.)·<창작방법의 논의>(동아일보, 1935.9.27.∼10.5.)·<행동주의문학론비판>(조선중앙일보, 1935.10.17.∼25.) 등이 있다.
또한 <조선문단의 현대적 제상-예술적 인식의 특수성>(조선일보, 1936.3.1.∼8.)·<예술과 정치와의 관계와 인간형의 문제에 대하야>(조선문학, 1936.5.)·<사회주의리얼리즘 재검토>(조선문학, 1936.6.)·<이갑기, 백철 양씨(李甲基, 白鐵兩氏)의 논(論)을 박(駁)함>(신동아, 1936.6.∼7.)·<진정한 리얼리즘에의 길>(조선문학, 1936.8.) 등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창작방법론의 신방면>(동아일보, 1936.9.19.∼25.)·<현대조선작가론>(조선문학, 1936.10.)·<휴맨이즘의 현대적 의의>(조선문학, 1936.12.)·<신진작가론>(풍림, 1937.1.)·<창작방법론의 신방향>(동아일보, 1937.9.19.∼25.)·<욕설비평의 근거>(동아일보, 1937.11.10.)·<세계관의 빈곤>(동아일보, 1937.11.2.∼7.)·<조선적 단편소설론>(동아일보, 1938.1.26.∼30.)·<낭만주의의 현대적 의의>(동아일보, 1938.3.26.∼30.) 등을 들 수 있다.
그의 비평은 세계관과 창작방법의 관계, 예술적 인식의 특수성의 문제를 논하는 단계로 발전되고 있으며, <조선 문단의 현대적 제상>은 일제 말기의 우리 비평계의 마지막 문학 논쟁을 대표하는 글이 된다.
광복 후에는 <건국과 예술운동>(인민보, 1945.10.)·<정치와 문화>(신건설, 1945.11.)·<문학의 혁명>(신건설, 1945.12.)·<민족문화의 본질>(인민, 1945.12.)·<예술운동의 전망>(예술문화, 1945.12.)·<조선연극에의 요망>(인민예술, 1945.12.)·<작가의 사상성>(예술, 1945.12.)·<문화전선 결성을 위하야>(중앙신문, 1945.12.)·<여성과 문학>(여성공론, 1946.1.)·<조선문학의 현단계>(인민, 1946.1.)·<예술운동의 한계>(조선일보, 1946.1.2.∼6.) 등의 비평을 발표하였다.
또한 <문학자의 자기비판>(우리문학, 1946.2.)·<전국문학자대회의 성과>(중앙신문, 1946.2.17.∼19.)·<문학운동의 새로운 방향>(신세대, 1946.3.)·<조선연극전통론>(인민, 1946.3.)·<조선문예비평사의 일단면>(우리문학, 1946.3.)·<진보적 리아리즘의 길>(중외일보, 1946.4.)·<고향연구>(신문학, 1946.4.)·<민족문학과 정치성>(문학, 1946.7.)·<조선낭만주의론>(신문학, 1946.8.)·<‘고향’ 연구>(신문학, 1947.5.) 등을 발표하였다.
그는 임화(林和) 등의 조선문학건설본부 측과 대립하여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의 조직에 앞장서서 1945년 2월 두 단체가 통합될 때까지 좌익문단의 강경파를 이끌게 된다.
특히 조선문학건설본부 측이 내세운 문학이념인 민족문학의 건설이라는 슬로건이 소시민적 한계에 갇힌 부르주아적인 것으로 비판하고, 문학운동은 프롤레타리아 전위의 지도하에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하였다.
조선문학가동맹이 발족한 후에도 이러한 견해를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으며, 1946년 초 월북하였다. 1960년대 초 숙청될 때까지 북한의 문학이론계를 대표하는 논객으로 활동하면서 ‘고상한 리얼리즘’ 등의 대표적인 창작방법론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