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5년 3월 인천에서 출생했다. 출생과 동시에 아버지 함근욱의 근무지에 따라 유년기를 보내고 목포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지만, 1929년 인천공립보통학교로 전학, 졸업했다. 1934년 인천상업학교를 졸업했다. 졸업 후 일본인이 경영하는 일한서방(日韓書房)에 입사했으나 1년 만에 그만두었다. 이 무렵 유치진, 김소운 등과 교류하면서 극작법을 배웠다. 1936년 『조선문학』에 단막희곡 「산허구리」로 등단했으며, 1939년 동아일보 주최 제2회 연극대회에 참가 「동승(童僧)」을 공연하여 극연좌상(劇硏座賞)을 받았다. 연이어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해연(海燕)」이 당선되었으며, 「낙화암」·「오월의 아침」·「동어(冬魚)의 끝」·「서글픈 재능」·「심원의 삽화」 등을 발표했다.
1941년 3월 친일극단 현대극장(現代劇場) 창립회원, 조선극작가동호회 회원으로 참여했다. 1942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전진좌(前進座) 연출부에 들어가 본격적인 연극수업을 받았다. 1943년 친일희곡 「에밀레종」을 창작했으며, 1944년 귀국해 일제의 정책에 부합하는 활동을 했다. 해방 후 발 빠르게 변신하여 좌익극단 낙랑극회(樂浪劇會)를 조직하고 창립공연으로 「산적」을 공연했다. 좌익계열 조선연극건설본부에 가담했으며, 조선연극동맹에 참여해 좌익문예 활동을 했다. 문예활동으로는 사회 비판과 사회주의 이데올로기 희곡 「기미년 3월 1일」·「태백산맥」·「고목」·「대통령」 등을 발표했다. 한국전쟁 중 1950년 6월 29일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