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이후에는 인공위성·미사일·우주선 등의 비행체까지 대상으로 하여 항공우주공학(aerospace engineering), 또는 항공 및 우주공학(aeronautical and astronautical engineering) 또는 항공학 및 항우학(航宇學)으로 표현하여 영어로 aeronautics and astronautics라 쓰기도 한다. 다행히 공(空)이라는 한자에는 대기권 내의 공기의 ‘空’자도 되고, 우주 공간의 ‘空’자도 되므로 ‘항공학’이라고 하면 aeronautics와 astronautics의 두 가지 뜻을 포함할 수 있다.
항공공학에서 다루는 기술 분야는 공기역학, 추진동력장치, 구조와 재료, 비행체운동의 성능, 안정성, 비행제도의 제어 및 유도, 최근에는 관성항법(慣性航法), 전자장비 등에 관한 첨단기술의 종합적 분야들이다.
교육과 연구의 필수적 설비는 저속풍동(低速風洞)·초음속풍동을 비롯하여, 비행기 운동의 시뮬레이션(simulation)을 연구하는 비행시뮬레이터(flight simulator), 구조해석용 실험장치, 엔진성능과 연료의 연소성능 실험장치, 비행운동의 제어와 유도 및 항법을 연구하는 실험장비와 고성능 전자계산기 등이다.
1903년 12월에 라이트(Wright, O.) 형제가 처음으로 동력비행에 성공한 이래 처음에는 비행기의 설계와 제조는 순전히 기계공학의 경험으로 이루어졌다. 비행기의 성능이 발달되고 군사면과 수송에서 가치가 인정되어 독립적인 학문연구와 교육이 절실해지자 1909년 영국정부는 항공자문위원회를 국가기관으로 설치하였고, 미국도 1915년 국립항공자문위원회(NACA)를 설립하였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미국항공우주국(NASA)의 전신이다.
제1차 세계대전중에는 비행기의 성능이 향상되고 군사목적의 이용도가 높아짐에 따라 항공공학의 독립적인 교육이 절실해지면서 미국의 미시간대학에서 1915년 2월 항공공학과 교육과정을 설치하였다. 1920년에는 미국 MIT공과대학에서도 독립된 항공공학 교육을 시작하였는데, 1927년 린드버그(Lindbergh, C.)의 대서양횡단 비행의 성공으로 미국의 유명한 대학을 비롯한 영국·프랑스·일본의 대학에서도 항공공학 교육을 시작하였다.
일본은 광복 전까지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 항공공학 교육의 기회를 주지 않았고, 다만 비행학교에서 조종훈련을 받게 하였을 뿐 설계와 연구 분야에 종사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대학에서 정식으로 항공공학에 관하여 공부한 학부졸업생도 없었으며, 미국 같은 나라에 망명한 청년들 중에도 없었다.
1947년 국립서울대학교 공과대학에 학부과정 교육기관으로 항공조선공학과(航空造船工學科)를 설치하여 두 가지 전공 분야로 분류하여 교육을 시작하였으나 전임교수의 확보도 어려울 뿐더러 교육시설도 없어서 기계공학과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였다. 1950년 5월 4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으나 6·25전쟁으로 대학교육은 사실상 전폐되었고 부산피난시절의 교육도 형편없었다.
서울이 수복되고 서울대학교 공(工)·농(農)·의(醫) 3개 대학의 부흥을 위하여 미국정부 원조로 교수의 도미파견교육 그리고 최신실험실습용 기자재를 도입하였다. 이 원조계획이 성공하였기 때문에 1960년대의 공업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항공공학과에는 국내 최초로 저속풍동·고속초음속풍동을 1961년에 설치하여 항공공학 교육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연구와 교육에 필요한 예산부족과 1979년 공과대학의 이전 등으로 항공공학의 교육과 연구는 부진하였으며, 1990년 이후에 산학협동 연구가 활발해졌다.
1980년부터 최신 전투기와 헬리콥터의 국내 조립생산공장이 가동되어 항공공업의 기반을 마련하기 시작하였다. 국방에 필요한 항공기술의 응용과 연구도 활발하게 시작되어 고성능초음속풍동시설을 설치하여 1990년대의 우리 나라 항공공업과 우주산업의 첨단기술 발전전망을 밝게 하고 있다. 1999년 현재 우리 나라에는 서울대학교·인하대학교·한국항공대학교 등 11개 대학교에서 항공우주공학과를 설치하여 교육과 연구에 열중하고 있다.
1957년 10월 4일 소련이 처음으로 스푸트니크 1호 인공위성을 발사한 이래 미국도 1958년 1월 31일 익스플로러 인공위성을 발사하였다. 약 10년간의 미소 양국의 우주경쟁에서 미국이 소련을 앞질러 1969년 7월 21일에는 아폴로 11호의 유인 달착륙에 성공함으로써 항공우주시대의 서막을 장식하였다. 한국항공우주연구소에서는 1991년부터 다목적 실용위성을 개발하여 1999년 10월에 350∼500㎏급 인공위성을 발사하였다.
국내에서도 이러한 세계추세에 동참하려는 목적으로 서울대학교 항공공학과를 중심으로 1971년 10월 한국항공우주학회를 조직하여 위상규(魏祥奎)가 초대 회장이 되어 학회활동을 활성화하고 학회지의 발간, 항공우주공학에 관한 강연 등을 개최하여 항공우주과학에 대한 국민의 관심을 높이고 있다. 또한, 이와 아울러 항공우주 분야에 대한 정부의 적극적 지원과 정책수립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