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사회의 발전 과정에서 우리나라에 불교가 들어온 이후 널리 퍼졌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성격이 동일하지는 않지만, 본래 불교 신앙 활동을 목적으로 조직된 신도들의 결사(結社)를 일컫는다. 그렇지만 신앙결사를 가리키는 일반적인 의미로도 쓰인다.
지금까지 확인된 최초의 향도 사례는 신라에서 609년(진평왕 31)경에 김유신(金庾信)을 중심으로 조직된 화랑도를 ‘용화향도(龍華香徒)’라고 지칭한 것이다. 그리고 삼국통일 직후인 673년(문무왕 13)에 백제에 속했던 연기(燕岐) 지역에서 백제 유민들이 모여 향도를 결성하고, 구체적인 신앙 활동으로 계유명삼존천불비명(癸酉銘三尊千佛碑銘)을 남긴 사례가 발견됨으로써 백제에도 향도가 존재했을 가능성을 보여 준다.
향도는 불교 신앙 활동 외에 중국의 의읍(義邑)이나 법사(法私), 일본 강(講)의 경우처럼 구성원간의 길흉경조(吉凶慶弔)ㆍ재난구제 등의 기능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구성원들이 자발적ㆍ자율적으로 결성한 신앙 단체이기 때문에 행정 편제나 생산 공동체 등과는 구별되지만, 향도가 존재했던 각 시기의 촌락 사회 구조 및 성장과 연관되어 지역 사회의 공동체 형성에 큰 구실을 담당해 왔다.
지역적으로는 전국적으로 분포하면서 불상ㆍ종ㆍ석탑ㆍ사찰의 조성 또는 법회ㆍ보시ㆍ매향(埋香: 내세의 복을 빌기 위해 향을 강이나 바다 속에 묻는 일) 등 대규모의 노동력과 경제력을 제공하는 등 불교 신앙 활동이 주류를 이루었다.
고대 사회에 나타나는 향도의 사회적 성격은, 화랑도를 향도라고 한 것에서 살필 수 있다. 고대 사회가 발전하면서 불교는 족적(族的)인 제약을 극복하는 사회 운영 원리를 제공했다. 초기에는 재래의 질서와 융합되기 어려운 면도 있었기 때문에 그에 적응하는 형태로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골품제가 점차 해체되어 감에 따라 기존 질서와의 관련이 상대적으로 적은 부류들은 사회 저변으로 확산되어 가는 정토신앙(淨土信仰) 등을 적극적으로 이용해 자기 기반을 확보하는 데 주력하였다.
이에 따라 신라 하대의 향도 조직들은 촌 또는 군현을 단위로 지역민들을 포괄하거나 지역 내 유력민들을 구성하여, 그들이 주도하는 공동체적 유대 관계 강화를 도모하였다.
고려 전기 향도의 조직 및 성격은 신라 하대의 것을 기본적으로 계승하였다. 신라 말 고려 초 관반(官班) 조직에 이어 지방 사회에서는 지방 세력들이 주도하는 정치적 공동체 읍사(邑司)가 전면에 부각되었으며, 향도는 이 조건에 일정하게 제약되기도 하였고 한편으로는 역으로 그것을 보강하기도 하였다.
1011년(현종 2) 예천(醴泉) 개심사(開心寺) 오층석탑의 건립에 참여한 미륵향도(彌勒香徒)와 추향도(椎香徒)의 사례는 이러한 모습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것이다. 두 향도는 각각 예천군과 그 속현이었던 다인현(多仁縣)의 향도로서, 임원이 각각 42명, 95명이었고 구성원의 합계가 1만 명에 달하는 대규모였다.
그리고 군내에서 최고 유력 계층인 호장가(戶長家)가 동냥으로써 탑의 건립을 주도하면서 광군(光軍)의 조직까지 동원한 것으로 보아 읍사가 관여된 것으로 추측된다. 실제로 997년(성종 16) 죽주(竹州) 장명사(長命寺)의 오층석탑을 건립했던 향도는 호장ㆍ창정(倉正) 등의 읍사 구성원들이 주축이 되어 결성한 것이었다.
그리고 추향도의 구성원 중에는 선랑(仙郎)도 있었는데, 선랑은 신라 시기의 유풍으로서 향도에는 불교 신앙뿐만 아니라 재래의 신앙 요소도 포함되었음을 알 수 있다. 982년 현풍에서 조직된 향도에서도 불교 신앙을 바탕으로 하면서 재래의 산신 신앙과 관련된 모습이 나타난다.
고려 전기 향도가 지역 공동체와 밀접하게 관련됨에 따라 국가적 차원에서 그 국중대회(國中大會)의 성격을 지니는 팔관회(八關會)ㆍ연등회(燃燈會)로 수렴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향도의 조직과 성격은 12세기 이후 사회 변동 속에서 변화되었다.
인종 때 위정자들에게 퇴폐적 행위로 지적되면서 금지되었던 만불향도(萬佛香徒)의 사례는 불회를 이용한 상거래, 불교와 재래 신앙의 습합, 새로운 질서의 갈망 등을 나타내는데, 당시 유망민들이 대량 발생하고 무뢰호협(無賴豪俠)의 풍조가 유행했던 상황과 관련해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를 계승한 고려 후기에는 우선 향도의 조직과 성격이 다양화되었다. 구성 계층상으로는 중앙의 고관들로 이루어진 향도부터 여성들만의 향도, 향촌 소민(小民)들의 향도 등이 있고, 불교 신앙의 요소가 드러나지 않으면서 향촌 공동체적 기능이 강화된 향도도 나타났다.
활동 내용으로는 전기까지 불상ㆍ석탑ㆍ사찰의 조성 등 대규모 불사에 치중했던 데 비해, 이때는 재회(齋會)ㆍ소향(燒香)ㆍ매향ㆍ염불ㆍ상호 부조 행위 등의 사례가 두드러졌다. 불구(佛具)의 제작에 관여한 경우에도 불화(佛畵)ㆍ소종(小鐘)ㆍ향완(香鋺)ㆍ발라(鈸鑼)의 조성 등 소규모 형태로 이루어졌다. 이와 함께 수백 명 또는 수천 명으로 구성된 대규모 향도는 보이지 않고 거의 소규모로 구성되었다.
『용재총화(慵齋叢話)』에 따르면, 조선 초기에 지역민들이 적게는 7∼9명, 많게는 100여 명씩 모여 향도를 구성했다고 한다. 이 시기의 변화 중에서 무엇보다 주목되는 것은, 불교 신앙 활동보다 향촌 공동체적인 모습이 더 부각되는 향도의 출현이다.
이것은 고려 후기 집약적 농업 기술이 발달하기 시작하고 농민층이 분화되는 과정에서 몰락 농민이 발생하는 한편, 상대적으로 자립성을 확보해 나가는 소농민들이 자신들의 기반을 보장할 수 있도록 향촌 공동체를 재구성할 필요성을 갖게 됨으로써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향도(鄕徒)’라고도 하는 이 유형은 자연촌을 기반으로 조직되었고 회음(會飮) 의식, 장례시의 부조 행위 등이 주된 활동 내용을 이루었다. 물론 불교 신앙에 입각한 향도에서도 기층민들은 염불향도(念佛香徒)의 형태로 소민불당(小民佛堂)ㆍ재암(齋庵)을 중심으로 사회 변화에 대응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향도의 향촌 공동체적 성격이 재지 질서와 결합되고, 또 보편적으로 나타나게 됨에 따라 조선 초기에는 국가 권력이 공적으로 향도를 단위로 역(役)을 징발하는 현상까지 나타났다.
16세기 이후 지방 사족(士族)들이 향약(鄕約)의 시행 등을 통해 성리학적 이념에 입각, 사회 질서를 자신들의 주도하에 재편성해 나가는 단계에서는 향도 조직이 직접적인 억제 대상이 되거나, 향약의 하부 편제 단위로의 편입 대상으로 구상되기도 하였다.
향약 가운데 상사(喪事)에 관한 규정이 포함된 것은 종래 향도의 기능을 대신하고자 한 것으로 파악되며, 향도를 사족들의 상계(上契)에 대응하는 하계(下契)로 편제하려고도 하였다. 17세기 후반 이후 이앙법의 보급 등 농업 생산력의 변화에 따른 사회 변동에 수반해 향도에도 큰 변화가 나타났다.
그 때까지 이동(里洞) 지역 공동체의 실체가 되어 온 향도가, 공동 노동 조직으로서의 기능을 두레가 담당하게 됨에 따라 상장(喪葬)의 일만을 수행함으로써 상두꾼으로 잔존하게 되었다.
즉, 지역에 따라 황두 등의 명칭으로 공동 노동 조직으로서의 성격이 변하지 않은 채 존속하기도 했지만, 이앙법의 보급에 따라 일반 농민들은 경제적ㆍ시간적 여유를 가지게 되어 자율성과 조직성이 훨씬 더 높아진 공동 노동 조직으로서 두레를 구성해, 조선 후기 촌락 사회의 공동체적 질서를 대표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