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남도 안주 출신.
1919년 3·1운동 후에 서울에서 조선독립청년단을 조직,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안국동 이도제(李道濟)의 집에서 노령(露領)지방의 이동휘(李東輝)가 경상북도 경주에 거주하는 최익선(崔益善)에게 보내는 “우리들의 행동을 찬조하여 독립운동자금을 보내주기 바란다.”는 내용의 서한을 강우규(姜宇奎)로부터 받아 오태수(吳泰洙)에게 전달하였다.
같은 해 8월 초순 원산에서 강우규와 함께 사이토[齋藤實]총독을 폭살하기 위하여 서울로 들어왔다. 강우규의 심부름으로 폭탄 1개를 더 가져오기 위하여 원산으로 간 사이 강우규가 사이토에게 폭탄을 투척하였다.
9월 17일 이 사건의 공범으로 붙잡혀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 6월을 복역하였다. 1921년 9월 다시 한흥근(韓興根)과 관련하여 폭탄은닉 혐의로 붙잡혔으나 예심 6개월 후 면소(免訴)되었다.
1922년부터는 평안남도 안주에서 동아일보사·조선일보사·중앙일보사의 지국장을 지내면서 계몽운동과 민족정신 앙양에 기여하였다.
1926년 10월 강중건사건(姜重健事件)으로 정주경찰서에 붙잡혀 6개월 간의 옥고를 치렀다. 1927년 신간회 안주지회 부회장 겸 정치부장을 지내면서 독립운동에 주력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