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양천(陽川). 초명은 열(說). 자는 중경(重卿), 호는 관설(觀雪)·둔계(遯溪)·일휴(逸休). 좌찬성 허자(許磁)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좌찬성 허강(許橿)이고, 아버지는 양천현감 허교(許喬)이다. 우의정 허목(許穆)의 사촌형이다. 장현광(張顯光)의 문인이다.
1623년(인조 1) 이항복(李恒福)의 천거로 내시교관(內侍敎官)이 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 때 의병장 김창일(金昌一)을 도와 공을 세웠고, 난이 끝난 뒤 제용감직장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사도시주부를 거쳐 지평현감이 되었는데, 내노(內奴)가 인폐를 끼친 바 있어 이들을 엄중히 다스려 숙폐를 일소하였다.
그러나 남살(濫殺)한 죄과로 투옥되었는데, 현민들이 호소하여 풀려나 치악산 둔계 시냇가에 소암(素庵)이라는 정자를 짓고 기거하였다.
1637년 태묘영(太廟令)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다가 그 뒤 의성현령, 형조·공조의 좌랑, 은사현감을 역임하고 1644년 세자익위사의 좌익위가 되었다. 인조가 죽자 원주의 관설로 돌아가니 이것으로 호를 정하였다.
1654년(효종 5) 선공감부정에 이어 지평이 되고, 곧 장령에 발탁되었다. 1658년 회양도호부사(淮陽都護府使)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으며, 효종의 장례를 당하여 장악원정이 되었다.
이 때 자의대비(慈懿大妃: 仁祖繼妃)의 복상문제로 예송(禮訟)이 일어나자, 서인의 기년설(朞年說: 1년상)에 반대하여 3년상을 주장하였다. 글씨에 능하며 특히 전서(篆書)에 뛰어났다. 원주 도천서원(陶川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둔계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