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적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전기에, 지제교, 예조정랑, 집의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태고(太古)
양재(養齋), 하의자(荷衣子)
이칭
준도(遵道), 학사전재(學士全才)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49년(명종 4)
사망 연도
1591년(선조 24)
본관
남양(南陽 : 지금의 경기도 화성)
주요 관직
예조좌랑|지제교|예조정랑|집의
정의
조선 전기에, 지제교, 예조정랑, 집의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태고(太古)·준도(遵道), 호는 양재(養齋)·하의자(荷衣子). 사성(司成) 홍이평(洪以平)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홍덕연(洪德演)이고, 아버지는 홍인우(洪仁祐)이며, 어머니는 생원 김영윤(金寧胤)의 딸이다. 판서 홍진(洪進)의 동생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72년(선조 5) 진사로서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승문원정자(權知承文院正字)가 되었다가 곧 사관(史官)이 되었다.

이듬해 사가독서(賜暇讀書: 문흥을 일으키기 위하여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만 전념케 하던 제도)한 뒤 1574년 정자로 홍문관에 들어가 10년 동안 봉직하였다.

1577년 부수찬에 오르고, 예조·병조의 좌랑을 거친 뒤 지제교를 겸하였다. 1580년 예조정랑이 되고, 이듬해 병조정랑으로 옮겼다가 곧 경기암행어사가 되어 민정을 살폈다. 그 뒤 교리·수찬을 지내고, 1583년 정언이 되었다.

이 해 양사(兩司)에서 이이(李珥)를 탄핵하자, 이것을 반박하다가 장연현감으로 좌천되었다. 1588년 병조정랑이 되었으며, 이듬해 교리·검상을 지낸 뒤 사임이 되었다가 그

해 겨울에 집의가 되었다.

경학(經學)에 밝고 논사(論思)를 잘하여 홍문관에서 ‘학사전재(學士全才)’라 불렸으며, 시문에 능하고 글씨도 잘 썼다. 저서로는 『하의집』·『하의시십(荷衣詩什)』이 있으며, 작품으로는 시조 한 수가 전한다.

참고문헌

『선조실록(宣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기언별집(記言別集)』
『구암유고(久菴遺稿)』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하의집(荷衣集)』
집필자
권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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