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군옥(群玉), 호는 반항당(盤恒堂). 아버지는 홍응복(洪應福)이다.
기대승(奇大升)·이이(李珥)·고경명(高敬命)의 문하에서 배워 유학에 조예가 깊고, 충의의 정신이 강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 각처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의 진중으로 나가 군량의 수집, 수송 등의 임무를 담당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도원수 권율(權慄)의 휘하에서 문서를 관장하고, 의병모집의 격문을 작성하였다. 1609년(광해군 1)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 전적·나주교수·남원교수 등을 역임하였다. 1623년 노인직(老人職)으로 첨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월정서원(月井書院)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