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자열(子悅). 임진왜란 이후 대일 관계에 있어서 난관에 봉착하면 반드시 일본에 파견되었다.
1년 동안에 3계급이나 특진하여 나이 50도 못 되어 숭록대부(崇祿大夫)의 위계에 올라 1644년(인조 22)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일본에 여섯 번, 대마도(對馬島)에 여러 차례 다녀왔고, 명나라에도 두번 사신으로 다녀왔다.
1649년 인조의 국상(國喪) 때 일본의 조제사(弔祭使)가 서울로 와서 진향(進香)하려고 하자, 이 문제로 부산에 내려가서 그 절차를 정하였으며, 그것이 그 뒤 일본사신의 전례가 되었다.
1657년(효종 8) 영의정 정태화(鄭太和)에게 일본에서 본 유황(硫黃)의 위용을 말하여 왕에게 그 필요성을 진언하게 하고, 1659년 문위사(問慰使)를 수행하여 일본에 가서 유황의 산화법(酸化法)을 배워와 우리나라에 전파시켰다. 1659년(현종 즉위년)에도 대마도에 다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