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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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
개념
물질의 조성 · 구조 · 성질 및 변화 · 제법 · 응용 등을 연구하는 학문.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목차
정의
물질의 조성 · 구조 · 성질 및 변화 · 제법 · 응용 등을 연구하는 학문.
내용

이를 물리화학·무기화학·분석화학·유기화학·생화학·고분자화학 또는 공업화학 등으로 분류하고 있다. 물질의 조성이란 어떠한 성분이 얼마만큼 들어있는지를 밝히는 것이고 원소분석을 거쳐 어떠한 분자들인지 알아내어야 한다. 물질의 구조란 보통 결정구조를 의미하고 더 상세히는 분자의 구조까지 살피는 것이다. 성질 및 변화는 분자속 전자의 상태와 움직임을 알면 쉽게 이해되나 일반인이나 비전문인들에게는 일상언어, 학술용어, 화학식을 써서 설명하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 화학은 8·15광복이 되기 전까지는 현대과학의 한 분야로 확립되지 못하고, 농경문화, 특히 식생활과 관련이 있는 발효기술 등의 제제기술, 실학 또는 중국의 서구선교사들이 전하여준 과학문명의 단편적 전래에서 비롯된 학문, 일제강점기의 식민교육과 전시체제 속에서 체계 없이 체득한 산업적 응용화학의 편린적 지식습득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광복이 되자 일본에서 서구식 학문으로서의 화학을 전공하고 돌아온 화학자들이 교육계에 투신하여 국내에서 공부한 공업전문학교 출신들과 함께 방향타 구실을 하게 되었다. 서울대학교 화학과의 이태규(李泰圭)와 응용화학과의 이승기(李升基)가 구심점 노릇을 하였으며, 중앙공업연구소의 안동혁(安東赫)이 배출된 인력을 활용하는 소임을 맡았다.

이렇게 교육계가 정리되면서 학회도 태동이 되어 대한화학회가 결성되고 초대회장에 이태규가 선출되었다. 학회가 결성되면서 화학의 분야별 연구업적이 논문의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하였으나 수준은 아직 미흡한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서구보다 수준이 낮은 일본의 화학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학문의 질 자체가 낮았고, 전쟁 때문에 기초과학이 푸대접을 받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좀더 기본적인 이유로, 갑자기 맞이한 광복이어서 학자들은 교육과 연구 틈틈이 행정의 공백을 메워나가야 하였던 점과 실험설비나 연구시설의 미비를 들 수 있다. 또 몇 가지 본질적 원인으로는 이(理)와 기(氣)를 따지던 우리 본래의 과학정신에 대한 자긍심이나 이해도 부족하였고, 특히 문헌과 기술정보에 접할 기회가 적었음을 지적할 수 있다.

화학분야는 ‘화학초록(Chemical Abstract)’이라는 연구결과 보고망이 만들어져 있어, 세계 각국에서 나오는 연구논문들을 읽고 재빨리 그 제목과 저자, 내용의 간추림, 쓰여진 약품의 이름, 특허번호 등을 찾아보기 좋게 분류해놓고, 논문이 실린 잡지의 호수와 쪽수를 알려준다. 그런데, 이러한 화학잡지와 기술문헌·특허정보 등에 어두웠기 때문에 연구나 학술진흥의 속도가 느렸던 것이다.

광복 전에는 몇몇 전문학교에 화공과(化工科)라는 과가 설치되어 학생들을 배출하였지만, 본격적인 화학연구를 하는 과가 설치된 것은 1946년 8월 국립서울대학교가 발족된 뒤부터이다. 국립서울대학교는 경성제국대학을 모체로 하여 여타 전문학교를 흡수하여 발족하게 되었으며, 곧이어 많은 사립대학이 설립되면서 겉으로나마 연구기관은 숫자를 채우게 되었다.

그러나 선진국에서는 산학협동에 의한 화학 발달이 이루어져 상업적 경쟁력이 하나로까지 여겨지는 등, 새로운 지식은 새로운 상품과 새로운 생활을 열어주고 있었다. 이러한 때에 6·25동란이 일어나 또다시 완전파괴에 가까운 학문적 공백기를 맞았으며, 화학계 인사의 납북과 그나마 있던 모든 연구시설과 설비의 파괴, 교육과 학술활동의 중단, 새로운 체계를 갖추기 전까지의 혼란 속의 진통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다소의 밝은 전망은 있었으니, 많은 소장학자들이 ‘기성에 안일한 안주’보다 실력만이 평가받는 새세상에 적응하려고 선진지식의 체득을 위한 유학의 길을 택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편, 대학의 정비와 연구소의 설립은 광복 후에 대학을 나온 사람들을 흡수하기 위해서는 시급하고도 필수적인 일이었다. 게다가 외국에서 학위를 받아오는 학자들의 수가 늘어나면서 일본교육 세대와 미국교육 세대간의 차이가 확실히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각 대학의 화학과 졸업생이 기업체에 진출하기 시작하자 대학원 진학과 취업의 세가 균형을 잡기 시작하면서 경기변동에 예민하게 반응을 보이게 되었다. 특히, 1960년대 초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세워지면서 불어닥친 화공·화학에의 뜨거운 바람은 대학입시부터 열기를 몰아와 높은 점수의 수준급 인재들이 화공·화학 쪽으로 많이 몰려들었다. 그밖에 학계 관계 업계, 특히 컴퓨터산업 쪽까지 그들의 활동범위를 넓히고 있다.

화학은 물리화학·유기화학·무기 및 분석화학·생화학·고분자화학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물론, 일반화학·환경화학·화학문헌학처럼 쉽게 분류되지 않는 일반적 과목도 있기는 하나, 분야별로 연구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물리화학

이론과 실험처럼 형태별로 나누지는 않으나 보통 이론만을 따로 떼어서 통계역학·양자역학으로 나누고, 둘 다 겸하거나 분야별 응용에 치우친 이론적 접근법을 포괄하여 이론물리화학이라 부른다. 열역학·전기화학·반응속도론·분광학·핵 및 방사화학 등이 실험과 이론 가릴 것 없이 물리화학으로, 모든 화학의 기본적인 지식을 체계화하여 설명해준다. 이론물리화학의 맥은 예일대학에서 재교육을 받은 김순경(金舜敬)과 표면화학과 액체론을 발전시킨 장세헌(長世憲)의 도움을 받아 일찍 이 땅에 뿌리를 내렸다.

요즈음은 컴퓨터까지 생겼으나, 그때만 하여도 연필과 전동식 계산기만 있으면 외국의 저명학자들과 경쟁하여도 될만한 유일한 분야였다고 여겨서 머리 좋고 수학에 취미 있는 학도들이 많이 진출하였다. 그리하여 오늘날 미국에 남아 있는 학자들이 몇 사람 있고, 돌아와서 활약이 큰 학자들도 꾸준히 연구와 교육에 전념하여, 이론물리화학에 관한 한 외국의 연구수준과도 어깨를 겨룰 만하다.

실험쪽으로는 외국의 추세가 손에 물이 드는 재래식 방법보다는 단추를 누르고 계기를 읽는 분광학적 방법을 즐기는 까닭에 격동을 겪어야 했다. 열역학·통계역학 쪽에는 그래도 친숙하였으나 양자역학적 바탕이 있어야 분광학적 실험의 구상 및 실험결과 해석이 가능한 것인데, 우선 그 기초가 부족하였기 때문이다.

다음 문제점은 실험기기의 값이 비싸고, 그것을 유지하고 보수하기 힘들며, 바뀔 때마다 자주 바꾸기 불편하여 연구의욕을 잃기 쉽다는 점이다. 국립과학연구소·국방과학연구소·한국과학원·국립대학과 기타 여러 국공립 연구소 등이 수출증대와 더불어 실험기기를 풍족히 사들였다. 사립대학도 정부보증차관 및 몇 차례에 걸친 미국과 일본의 원조 덕분에 실험기기가 도입되면서 선진외국에 비하여 손색이 없게끔 되었다.

그러나 한가지 지적하여야 할 중요한 문제점은 외국학자들이 한글로 된 우리 나라의 질 높은 논문을 인용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래서 1980년에 이르러 <Bulletin of the Korean Chemical Society>라는 영문 화학회지를 따로 발간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아직도 외국에 우리 화학계의 발전을 알리기에는 여러 모로 부족하다고 하겠다.

(2) 유기화학

학문으로서의 매력이나 우리 나라 화학연구사에서의 초기활동은 보잘 것 없었으나, 요즈음에는 오히려 유기화학의 활동무대가 넓어지고 각광도 크게 받아 화학분야의 총아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우선 공업화학 쪽에서의 유기화학자들이 납북된 이후 서울대학교의 장세희(張世喜)·이태녕(李泰寧), 고려대학교의 김태린(金泰麟), 연세대학교의 한치선(韓治善) 등이 김태봉(金泰鳳) 등의 뒤를 이어 유기화학 분야의 교육과 연구에 전념하였다. 이들이 스스로 박사학위를 받으면서 배출해낸 석사·박사들이 이제는 모두 대학과 연구소, 그리고 산업계 일선에서 다양한 연구를 깊이 있게 진행시키고 있다.

실험, 특히 합성쪽 유기화학은 마치 외과의사처럼 체계 잡힌 지식과 몸에 밴 실험기술과 창의력을 요구하는 분야이기 때문에 집념과 체력까지 갖추어야만 성공적인 연구결과를 기대할 수 있다. 유기화학의 기본이 되는 반응 속도론 중심의 이론유기 및 물리유기, 분광학적 구조결정법, 유지적성 분석 등 기초부문 교육과 다양한 응용 쪽 교육에 종사할 사람의 수효보다 월등히 많은 유기화학자들이 생기고, 산업 쪽의 수요도 점차 늘어나 실험실용 시약, 공업용 화공약품 등의 생산 및 판매에 기술적 뒷받침이 얼마나 쓸모 있었는지 보도되기 시작하였다.

우리 나라 학자들의 교육수준은 외국 유명대학의 저명교수에게서 학위를 받았으므로 별문제가 없으나, 연구의 내용·발전속도·응용성은 국력과 비슷한 정도로 여기면 될듯하다. 다루는 약품이 인체에 해로운 경우가 많고, 실험 도중 겪게되는 사고나 위험이 크고, 특히 장시간 일에 매달리는 특성 때문에 선진국의 유능한 인재들이 가정생활을 희생하면서까지 유기화학분야에 종사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늘고 있어서 차츰 우리 나라를 비롯한 중진국 학자들의 진출과 대두가 펼연적이리라 본다.

(3) 무기 및 분석화학

물리화학에서 분가를 시켜 무기약품을 다룬다거나 분석 위주의 일을 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을 뿐이지 실제는 물리화학이라 하여도 무방하다. 이제까지 무기화학은 물질의 구조, 결정의 구조, 물성 및 무기물질의 반응을 연구대상으로 삼고 비교적 실용성이 큰 연구과제를 물리화학 비슷한 방법론을 써서 해결함으로써 대학교·한국원자력연구소·한국금속연료연구소·한국과학기술연구소 등에서 논문과 연구결과가 꾸준히 발표되었다.

분석 역시 습식분석·전기화학·기기분석 등속은 물리화학이면서 분석실에서 관심 있어 하는 일들이나, 분석기기와 연관지어지는 연구를 통틀어 분석이라 이름지었을 뿐이다. 그런데 외국에서는 너무 빨리 분석에 대한 인식이 분광학 쪽으로 옮아가면서 우리 나라에서 분석실을 맡아 일을 할 요원이 배출되지 않는 바람직하지 못한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실제 분석화학에 종사하는 학자들은 거의 만능·박학·호인의 세 가지 자격을 갖추고 산학연구건 협업연구건간에 신속히 처결해주는 미덕을 보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하나라도 결격일 경우 활동에 제약을 받아온 고달픈 분야였다. 다행히도 국내의 모든 대학들의 교육과정이 아직 미국처럼 분광학 일변도로 변환하지 않았기 때문에 석사출신의 분석연구에 종사할 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어 있기는 하다. 무기화학의 최상업(崔相嶪)·구정회(具廷會) 등과 분석화학의 최규원(崔圭源)·박기채(朴基采)등이 광복 후부터 꾸준히 활동을 하고 있다.

(4) 생화학

생화학은 당연히 의과대학·약학대학·농과대학·이과대학 등에 학과가 생겨야 하였는데, 불행하게도 그 설립이 늦었다. 생화학회는 김태봉을 초대회장으로 1967년 발족되었으나 요즈음에는 생명과학이다. 첨단과학이다 해서 유전자공학을 찾는 등 사회의 인식과 요구가 뜻과 같지 않아 연구활동은 그다지 활발하지 못하다.

생화학 실험에는 막대한 경비와 시간과 인력이 드는 것이 보통인데, 시약과 실험자료를 쉽게 구할 수 없다는 가장 심각한 애로사항까지 겹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삼 중심의 생약추출에 관한 연구에서만 다소 활기를 띌 뿐 장래가 그다지 밝지 않을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또한, 대학에서 경비가 드는 학과의 증설을 기피하였던 후유증을 꽤 오래 감수하여야 할 것이다. 앞으로 이 분야에 대한 기대가 커질 것이 확실해짐에 따라 국제적 추세도 추세려니와 한국적 지역 및 상황 특성에 알맞은 계획성 있는 학술진흥을 기획하여야 할 것이다.

(5) 고분자화학

동양에서 최초로 고분자화학의 기틀을 잡을 기회가 이승기의 납북으로 무산되었지만, 성좌경(成佐慶)을 비롯한 원로로부터 신진학자들에 이르기까지 생산성이 높은 활동을 하고 있다. 논문의 수나 산업계에 대한 기술자본 기여로 볼 때 다른 분야의 화학자들보다 수준은 그런 대로 따라가지만, 석유제품인 원자재가 몇 가지밖에 생산되지 않고, 물량이 많지 않으며, 다양성이 없는 탓으로 생산과 연관된 기술수준은 신통치 않은 것이 사실이다.

(6) 기타분야

환경화학·사회열역학 등 언뜻 보아 별로 연관 없어 보이는 쪽에 지금까지 화학자들의 관심과 기여가 컸던 사실도 언급하여야 한다. 특히, 과학사의 전상운(全相運)·송상용(宋相庸) 등은 화학보다 과학사 쪽에서 더 알려진 화학자들이다. 사회열역학은 1978년 최동식(崔東植)·박형석(朴炯錫) 등에 의하여 시작되어, 외국에서 발전적으로 커가는 비평형열역학적 사회열역학과 함께 사회의 관심을 끌고 있다. 통계열역학에 바탕을 둔 사회열역학은 앞으로 새로운 패러다임이 될 가능성이 있기에 주목을 받고 있다.

환경화학은 주로 의학·생화학·분석화학·공업화학 분야의 관심과 합치되어 교육이나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자연계 오염, 공장의 공해방지 등 문제점이 많은 데 비하여 연구열이나 참여도나 성취도는 아직 낮은 편이다. 그러나 과학사회학 쪽으로의 연구는 곧 활발하여질 것으로 믿어진다. 화학도들의 사회참여도는 물리학이나 생물학 쪽에 비하여 높은 편으로, 특히 사회과학 분야의 학술연구에 적극 참여할 의사를 밝히고 있다.

1970년대 초반은 북한의 경제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았었지만, 방위산업·중화학공업 육성을 위한 정부주도의 자금과 조직력 확보 노력은 개발이란 이름의 선진기술 도입위주의 모방으로 북한과는 상당한 격차를 보이게 된다. 1980년대에 이르러 수입에 의존하던 화학약품, 화공 및 의약품 등을 수출까지 하게 되고 나선 기술도입, 모방기술에서 기초과학 육성으로 창조적 업적으로까지 발전시켜야 된다는 사명감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화학연구소를 비롯한 많은 화학관련 연구소가 대덕의 연구단지에 자리잡게되고, 1970년에 유학을 떠났던 신진 학자들이 돌아와 학교·연구소·산업체에 직장을 구하였다. 연구비는 교육인적자원부에서 과학계에 베푸는 것보다 과학기술부쪽 조달액이 더 커진지 오래였다. 연구비의 액수도 그렇지만 연구 풍토조성에 산학계통 재단의 역할도 대단하였다.

1980년대 후반에 이르러 산학연으로 연구소의 비중이 커지면서 민간주도, 즉 민간 산업체 연구소의 생화학·약학·고분자 연구가 활발해졌고, 연구소 직원들의 재교육을 위한 대학원의 산학연 과정들이 개설되었다. 학회 활동도 대한화학회·한국화학공학회에 이어 생화학·섬유화학·고분자화학·공업화학 분야의 학회가 결성되었다.

선진국의 경쟁체제로 접어들기 위해서 창의력과제를 9년 동안 돕겠다는 기획이 1997년에 시작되었고, 1999년에는 BK21 이라는 연구비지원 방침이 과학기술부와 교육인적자원부에 의해 각각 시행되기에 이르렀다. 1997년 말 현재 ≪화학인력총람≫에 의하면 2,365명의 화학인들이 직장을 가지고 있는데, 대부분이 대학교의 전임강사급 이상의 교직을 가지고 있고 그 밖에 기업체·연구소·국가기관 순서로 분포되어 있다.

전국 대학교수 중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경우가 30%에 이르고, 10%정도가 일본·프랑스·독일·영국의 학위를 취득하였다. 연구분야별로 보면 고분자화학(12.2%), 공업화학(3.9%), 농화학(2.8%), 무기화학(7.8%), 물리화학(13.3%), 분석화학(8.5%), 생화학·생명공학(8.5%), 식품 및 영양화학(2.5%), 유기화학(19.2%), 의약화학·약학(4.7%), 재료화학(4.6%), 전기화학(2.2%), 지구화학·환경화학(4.0%), 핵화학·방사선화학(0.9%), 화학공학(9,6%), 화학교육·과학사(0.6%), 생산·관리(0.7%) 등이다.

전 인류의 숙제는 우리 나라의 문제이기도 하다. 20세기에 해결해야 할 과학의 문제점으로는 인류의 기근, 즉 식량문제와 에너지문제, 환경오염문제, 질병 및 건강문제를 들 수 있다. 이러한 문제점 해결에 화학인들이 참여도가 큰 만큼 그 책임도 크다 할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화학이 어떤 분야 위주로 활동 특색을 보여 정체성을 이룰 것인지에 대해 공감대 형성이나 분위기 조성이 되어 있지 않다. 또 독특한 연구업적이나 학설을 내놓은 큰 학자의 출현이 있어야 하고 게다가 보완·협력적으로 학풍을 이루려는 상황적 협조가 뒤따라야 한다.

국가의 사활을 걸고 ‘꿈의 기술’을 개발하겠다는 정책입안자의 의도와 기초과학이나 응용과학 분야의 교육을 더 값져하는 진학 풍토조성이 맞아 떨어져야만 우리 나라의 화학도 학문의 진전과 기술의 발달이 가능하다. 서구과학에서 동양과학으로의 전환 즉, 물질적 풍요와 현실적 만족보다는 정신적 풍요와 영세적 만족을 지향하는 쪽으로 우리의 민족과학은 자리잡아 가리라 본다.

이러한 대처가 우주시대, 격변의 시대가 될 21세기에 서구과학을 선도해 나갈 입장 확보에 도움이 될 것이다. 한약(韓藥)·한의학(韓醫學)을 살리는 한화학(韓化學)이 나타나 삼혼칠백의 숲과 나무를 다 설명하여 대관세찰을 할 때 이 모든 것은 당연히 이루어지게된다. 그러나 단순통합이 아닌 변증법적 발전이 될 것이고, 통합과학은 사회과학·인문과학·자연과학의 분야 통합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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