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평해(平海). 아버지는 개국공신 황희석(黃希碩)이다.
1401년(태종 1) 금주령을 어기고 술을 마시다 영흥부로 유배되기도 하였다. 1405년(태종 5) 무과회시(武科會試)에 급제하고, 다음해 호군방(護軍房)이 다시 설치되면서 방주(房主)가 되었다. 1407년(태종 7) 축첩문제로 파직되었으나 개국공신의 후예라 하여 곧 사면되었다. 각위(各衛)에 절제사를 두면서 1411년(태종 11) 충좌사첨절제사(忠佐司僉節制使)가 되었다.
1419년(세종 1) 세종이 등극하여 왜구의 진원지 대마도(對馬島)를 정벌할 때 삼군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 이종무(李從茂) 휘하의 중군장에 임명되었다. 1426년(세종 8) 도총제가 되었는데 세종이 군을 친열할 때 군법을 문란하게 하였다 하여 편(鞭) 50의 벌을 받았다.
이듬해 병조판서로서 황희(黃喜) 등과 같이 양녕대군(讓寧大君)의 폐출을 주장하였으며, 육진(六鎭)의 하나인 경원이 여진의 침구가 빈번하니 곡창지 용성(龍城)으로 옮길 것을 건의한 바 있다.
그러나 1428년(세종 10) 병조판서의 중책을 지닌 자로, 기첩(妓妾)을 만나느라 왕을 호가하지 않았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고성으로 유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