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이직(而直), 호는 몽죽(夢竹). 공조판서 황형(黃衡)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황기(黃琦)이고, 아버지는 대호군 황대임(黃大任)이며, 어머니는 생원 안세형(安世亨)의 딸이다.
1579년(선조 12) 생원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권지(成均館權知)와 박사를 역임하고, 감찰·지평·집의 등을 두루 지냈다. 또한, 호조·병조·형조의 정랑을 거쳐 성균관직강을 지냈으며, 선공감정과 군자감정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1591년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들어가 왜국의 상황을 상세히 보고하여 명나라 조정의 칭찬을 받았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기도순찰사 권징(權徵)의 종사관이 되어 군량미 조달에 힘썼다.
1594년에 파주목사가 되고, 1597년 접반관(接伴官)이 되어 명나라의 사신을 영접하였다. 1600년 철산군수가 되고, 1604년 부평부사가 되었다.
1608년에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호조와 공조의 참의를 지내고, 함경남도병마절도사로 추천되었으나 대북파의 방해로 임명을 받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그들의 모함을 받아 체포되었다가 심희수(沈喜壽)의 변호로 석방되었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이 난을 일으키자, 춘천부사로서 군사를 이끌고 솔선하여 왕을 호종하였으나, 난이 평정된 뒤 무고로 황해도 연안에 유배되었다가 무고임이 밝혀져서 그 해 겨울에 풀려났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복직되어 경기호소사(京畿號召使)로 의병을 불러모아 적에 대비하다가 그 해 겨울에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