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맹충(孟忠). 초명은 동(董)으로, 태종이 동중서(董仲舒)가 다시 났다고 해 지어준 이름이다. 황석부(黃石富)의 고손으로, 증조는 황균비(黃均庇)이고, 할아버지는 황군서(黃君瑞)이며, 아버지는 영의정 황희(黃喜)이다.
태종에게 불려나가 이름을 하사받은 뒤 음보(蔭補)로 공안부부승(恭安府副丞)이 되었다. 그러나 얼마 뒤 그 이름이 형제들과 맞지 않다 해서 다시 치신이라 고쳐 하사받고, 곧 사재직장에 임명되었다.
그 뒤 여러 관직을 거쳐 사섬시주부가 되었다. 1415년(태종 15) 통례문봉례랑을 거쳐 감찰이 된 데 이어, 호조좌랑과 사온서영(司醞署令) 등을 역임하였다.
1426년(세종 8) 형조정랑이 되어서는 세도가에서 민간을 잡아다 노비로 만들어 50여 년간을 소송하던 적체된 사건을 해결하였다.
이듬해 호조정랑으로 익찬(翊贊)을 겸임했으며, 이어서 판통례문사 겸 상서소윤(判通禮門事兼尙瑞少尹)이 되었다. 1433년에 동부승지, 1435년 예조참의를 거쳐 호조참의가 되었다. 그리고 1437년에 중추원부사가 되었다가 곧이어 한성부윤으로 옮겼다.
그의 탁월한 정치 능력을 인정받아 경기도도관찰사와 경창부윤을 거쳐, 형조와 호조의 참판을 역임하였다. 1444년 호조판서에 승진해 곧 판한성부사로 옮겼다. 1448년 모친상을 당해 사임하고, 1452년(문종 2)에는 부친상을 당해 거상하였다.
1454년(단종 2) 다시 중추원사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하성절사(賀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도진무사(都鎭撫使)를 겸하였다. 1457년(세조 3) 충청도병마절도사가 되었으며, 곧이어 인순부윤(仁順府尹)이 되었다가 인수부윤(仁壽府尹)으로 옮겼다.
1461년에는 판중추원사가 되었다가 남의 노비를 빼앗은 죄목으로 파직되었다. 1466년 동지중추부사 겸 도총관으로 복관되어 1479년(성종 10) 판중추부사에 이르렀다. 뒤에 우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호안(胡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