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회지(晦之), 호는 독석(獨石). 조지서별제 황기준(黃起峻)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행호군 황열(黃悅)이고, 아버지는 판서 황정욱(黃廷彧)이며, 어머니는 조전(趙詮)의 딸이다. 기대승(奇大升)의 문인이다.
1570년(선조 3) 진사가 되고, 1580년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 집의·사간을 역임한 뒤 우승지가 되어 1591년정철(鄭澈)이 건저문제(建儲問題)로 위리안치될 때 그 일당으로 몰려 삭직되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호군으로 등용되어 아버지 정욱과 함께 사위인 왕자 순화군 이보(順和君 李보)를 따라 강원도를 거쳐 회령으로 갔다가 모반자인 국경인(鞠景仁)에게 붙잡혀 왜군에게 인계되었다.
그 뒤 안변의 토굴에 감금되어 갖은 고초를 받다가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에게 끌려나가 선조에게 항복권유문을 쓰라는 강요를 받고 항복권유문을 썼다. 그러나 몰래 별도로 아버지 황정욱이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적어서 보냈다. 1593년 부산에서 두 왕자와 함께 송환되었다.
그 뒤 항복권유문을 썼다고 반대파의 탄핵을 받아 이산(理山)에 유배되었다가 신천으로 이배(移配)되었다. 1612년, 전날에 이이첨(李爾瞻)을 시로써 풍자한 일 때문에 미움을 받아, 순화군의 아들 진릉군 이태경(晉陵君 李泰慶)을 왕으로 추대하려 한다는 무고를 받고 투옥되어 고문을 받다 죽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이후 복관, 좌찬성에 추증되고, 장천군(長川君)에 추봉(追封)되었다. 저서로 『독석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