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자유(子由), 호는 만랑(漫浪). 인적 사항에 대해서는 상세히 전하는 문헌이 없다.
약관에 대과(大科)에 등제하여 주서가 되었다가, 1625년(인조 3)부터 여러 차례 직언으로 파직되는 등 관운이 순탄하지 않았다.
1637년 통신사의 종사관으로 일본에 다녀왔고, 같은 해 장령이 되었다. 1640년 부수찬, 1641년 교리, 1645년 2월 영남어사로 영남지방을 시찰하였고, 4월에 장령, 5월에 사간이 되었으며, 1648년 대사성이 되고 곧 대사간이 되었다.
1649년(효종 즉위년) 김자점(金自點)과 연루되었다 하여 참소를 입고 1650년 파출되었으나 다시 대사성이 되고, 사은사(謝恩使) 이시백(李時白)의 부사로 연경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1660년(현종 1)에 신원(伸寃)되었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인조조고사본말(仁祖朝故事本末)의「박홍구지옥(朴弘耉之獄)」]에 의하면, 황호는 서인 계열이었으나 인성군(仁城君) 이공(李珙)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남인의 견해를 따랐다고 한다. 황호의 문재(文才)는 당대의 신진 중에서 발군의 측면이 있었고 문명(文名)을 크게 떨쳤다고 한다. 저서로는 『만랑집(漫浪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