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당집(忘憂堂集)』은 의병장 홍의장군인 망우당(忘憂堂)곽재우의 시문집으로 그의 내외 후손들이 시문과 각종 사적들을 수집하여 서문과 발문을 붙여 간행하였다.
『망우당집』의 초간본은 중간 발문을 참고해보면 곽재우의 사후에 그의 아들과 사위 성이도(成以道) 및 내·외손들이 그의 시문을 모아 2권 1책으로 간행한 것이다. 현전하는 초간본에 1629년(인조 7) 곽유(郭瀏)의 발문이 수록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초간본은 곽재우 사후인 1622년(광해군 14)에서 1629년(인조 7)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초간본의 내용이 소략하고 편차가 정돈되지 못하여 내·외손들이 다시 중간(重刊)하였는데, 이때 연보를 외손 신시망(辛時望)이 대폭 증수하였다. 이후 증직(贈職)·증시(贈諡) 등의 사실을 1771년(영조 47) 중간본을 발간하면서 한차례 더 증보하였는데, 이때 곽재우의 6세손 곽진남(郭鎭南)이 원유(院儒)·후손들과 함께 현풍현감(玄風縣監) 김사혼(金思渾)의 발문을 받아 예연서원(禮淵書院)에서 개간(改刊)하였다.
이 책은 목판본으로 5권 3책이다. 광곽(匡郭)은 사주쌍변(四周雙邊)이고, 반엽(半葉)의 크기는 29×19.2㎝이며, 계선(界線)이 있다. 글자는 10행(간혹 8행) 20자이며, 주쌍행(注雙行)에 판심(版心)은 상하내향백어미(上下內向白魚尾)이다. 표지의 크기는 20.5×15.4㎝이다. 표지의 서명은 망우당집(忘憂堂集)이고, 권두의 서명은 망우선생문집(忘憂先生文集)이며, 판심의 서명은 망우집(忘憂集)이다. 1629년(인조 7) 허목(許穆)의 서문과 곽유(郭瀏)의 발문, 1771년(영조 47) 김사혼의 발문이 수록되어 있다.
본서는 5권 3책으로 간행된 중간본이다. 목록을 살펴보면, 권수에 서·발·유묵·세계(世系)·연보·목록이 있고, 제1권에 시·서·논·문, 제2권에 소, 제3권에 장(狀)·유훈(遺訓)·부록, 제4권에 부록, 제5권에 부록·사제문·사액제문 등이 있다.
서문은 허목이 쓴 것으로 1689년 예원서원의 사액을 윤허받은 후 후손들이 중간에 수록한 것이다. 세계는 1세 곽자의(郭子儀)로부터 13세 곽재우와 이후 20세까지 수록되어 있다. 연보는 곽재우의 출생에서부터 사망 후 이듬해에 사당이 세워지기까지의 일대기를 기록한 것이다. 여기에는 구 연보가 소략하고 외손 신시망이 찬한 연보 역시 누락된 것이 있어 두 가지를 대조하여 보충하고‚ 증직·증시·서원봉안 등의 사실을 첨부한다는 설명이 있다.
서문에는 곽재우가 김성일(金誠一)·이원익(李元翼)·김덕령(金德齡), 사위 신백희(申百熙)와 성이도 등에게 보낸 편지가 수록되어 있다. 소에는 곽재우가 임진년에 의병을 일으키면서 임금에게 그 이유를 밝히는 상소 「자명소(自明疏)」와 모친상으로 벼슬에 나가지 못한다며 올린 상소 「사기복제(辭起復第) 1∼3소」, 반역죄에 연루된 영창대군을 보호하기 위하여 올린 글 「구영창대군소(救永昌大君疏)」 등이 수록되어 있다. 장에는 경상 좌병사로 부임한 곽재우가 도산성(島山城)의 수비를 청한 글 「청선도산성장(請繕島山城狀)」와 성주목사로 있던 곽재우가 산성 수축이 급무임을 진언한 글 「정도원수품축산성장(呈都元帥稟築山城狀)」 등이 수록되어 있다. 훈유에는 현손 원갑(元甲)이 유사(遺事) 가운데서 모은 글로 일상사에서 지켜야 할 일을 기록한 「거가잡훈(居家雜訓)」 등이 보인다. 부록은 권4와 권5에 수록되어 있으며, 여기에는 곽재우의 시장(諡狀)·묘지명·신도비명·묘표 등 지문류와 제문·축문·고유문, 각종 문헌에서 발췌한 곽재우 관련 사적의 초록 등이 수록되어 있다. 곽유의 발문은 1629년(인조 7) 성이도가 간행한 초간본의 소루함을 안타까워하여 증보하여 중간한다는 내용이고, 1771년(영조 47) 김사혼의 발문은 후손 곽진남(郭鎭南)이 영남에 부임하여 유고를 보여주며 소루한 데가 많기 때문에 유작을 수집하고 조야 명신들의 문집에서 관계 사실을 초록하여 증보하고 권수에 연보를 붙여 3책으로 중간한다는 내용이다.
『망우당집』은 곽재우의 문학과 의리에 대한 인식뿐만 아니라 당대 정치와 사회의 제반 문제에 대한 그 구체적인 대안을 파악할 수 있는 실증적 자료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