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8년(영조 4) 3대 가집 중의 하나인『청구영언』을 편찬한 남파(南坡) 김천택(金天澤, ?~?)이 1746년(영조 22)에『해동가요록』을 편찬한 것으로 추정된다. 본서는 김수장(金壽長)이 1755년(영조 31)에 편찬한『해동가요(海東歌謠)』(박씨본)의 저본이 되었다.
『해동가요록』이 현재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정확한 발간 경위를 알 수는 없으나, 1728년(영조 4)『청구영언』(진본)을 수정하는 차원에서 만들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현재 실물이 남아있지 않은 관계로, 김수장이 편찬한 『해동가요』(박씨본)의 저본이 되었다는 점 이외에 『해동가요록』의 서지 사항을 밝힐 수 있는 단서는 전혀 없다.
김천택이 1728년(영조 4) 『청구영언』에 이어 1746년(영조 22) 『해동가요록』을 다시 편찬했고, 김수장은 1755년(영조 31) 『해동가요』(박씨본)를 편찬하기 위한 저본으로 그것을 사용했다. 이 점은『해동가요』의 「화사자발문」과 한유신의 「영언선서」, 김수장의 자작품 발문 등에서 추론할 수 있다. 즉 『해동가요』는 『청구영언』(진본)을 저본으로 하지 않고, 『해동가요록』을 저본으로 했다는 것이다.
김천택은 『청구영언』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홍만종(洪萬宗)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으로 보이며, 그 점은 ‘만횡청류(蔓橫淸類)’를 중시했다거나 자신을 ‘여항육인(閭巷六人)’의 한 사람으로 넣은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사실을 『해동가요록』이 갖는 가집 편찬사적 의의로 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