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 동작구는 동쪽으로 서초구, 서쪽으로 영등포구, 남쪽으로 관악구에 접해 있으며, 북쪽으로는 한강 건너 용산구와 영등포구 여의도와 접해 있다. 위치는 동경 126°45'∼126°59', 북위 37°28'∼37°30'이다. 면적은 16.35㎢, 인구는 40만 641명이다.(2015년 현재) 행정구역으로는 15개 행정동(9개 법정동)이 있다. 구청은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2동에 있다.
동작구에 위치한 한강대교 부근의 흑석동 일대는 한강의 심한 곡류로 인한 공격사면(攻擊斜面)으로 침식을 많이 받아 침식애(侵蝕崖)가 발달해 있다. 또한 동작천은 북쪽으로 흐르다가 한강으로 흘러들어가며, 여의도의 샛강은 영등포구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동작구의 연평균 기온은 13.3°C이다. 1월 평균기온은 0.4°C, 8월 평균기온은 26.5°C이며, 연 강수량은 1212.3㎜이다.
동작구는 한강을 끼고 있다는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신석기시대 이래 사람들이 거주해왔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동작구 지역 내에서 선사시대에 해당되는 토기와 유구 등이 출토된 바 있다. 특히 신석기시대에는 사람들이 강가에서 고기잡이를 하며 생활하였기 때문에 한강을 끼고 있는 동작구 지역은 이러한 점에서 사람들이 활동하기 좋은 생활공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시대에 들어와 백제의 영역에 속해 있었으며, 주민들은 주로 현재의 가락동이나 몽촌토성 주위에 정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고구려의 광개토왕과 장수왕의 영토 확장 정책에 의해 동작구 지역은 고구려의 영토에 속하게 되었다. 이때에는 행정구역 상으로 고구려 남부에 속해 대방동 · 신대방동 · 상도동 지역은 잉벌노현(仍伐奴縣)에, 노량진동 · 동작동 · 사당동 · 흑석동 지역은 율목군(栗木郡)에 속해 있었다.
이후 신라에 의해 삼국이 통일되면서 행정조직이 주군현(州郡縣) 단계로 정비되었으며, 고구려에 속했던 동작구 지역도 새로운 지명으로 바뀌게 되었다. 즉 잉벌노현은 곡양현(穀壤縣)으로, 율목군은 율진군(栗津郡)으로 개칭된 것이다. 이를 지명상으로 볼 때 현재의 대방동 지역은 농업 지역이었을 것으로, 노량진 동쪽 지역은 밤나무가 많았던 지역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이 시대에 와서 진(津)이라는 명칭이 시작된 것으로 보아 노량진 일대에 나루터가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 들어서면서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지방의 행정명칭이나 체제도 다시 바뀌게 되었다. 940년(태조 23)에는 전국 주군현의 명칭이 바뀌었으며, 이에 다라 곡양은 금주(衿州)로, 율진군은 과천(果川)으로 개칭되었다. 또한 1018년(현종 9)에는 행정구역을 개편하여 금주를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에, 과주(果州)는 광주목(廣州牧)에 속하게 하였다. 금주현은 995년(성종 14)에 단속사(團束使)를 설치했던 곳이었으나, 이를 없앤 1005년(목종 8) 이후부터는 중앙정부에서 파견한 관리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군현에는 중앙정부의 관리가 파견된다는 전래에 근거할 경우, 금주현과 광주군에는 감무(監務)라는 지방관이 파견되기 전까지 호장(戶長)이 지역을 책임지면서 중앙정부의 간접적인 관리를 받는 형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금주현은 명종 이래로 행정구역상의 큰 변화는 없었으나, 과주군은 1308년(충렬왕 34)에 용산처(龍山處)가 부원현(富原縣)으로 승격되어 분리되었다.
1018년(현종 9) 실시한 행정구역 개편에서 주목되는 것은 ‘경기’라는 행정명칭이 최초로 생겼다는 점이다. 초기에는 임진강 이북 지역을 관할하여 장단현령이 그 책임을 맡고 상서도서의 직속으로 하였으나 1069년(문종 23)에 와서 현재의 경기도 지역과 유사한 행정구역을 흡수하였으며, 이때부터 금주군과 과주현은 경기도라는 행정구역 속에 포함되었다. 1390년(공양왕 2)에는 다시 경기도 좌도와 우도로 나누었는데, 현재의 동작구는 경기도 좌도에 속하게 되었다.
조선시대인 1413년(태종 13)에도 지방 행정구역 개편이 있었는데 경기도는 고려시대에 좌우도로 나누었던 행정구역을 다시 합해 경기좌우도라고 하였다. 또한 대대적인 읍호개정(邑號改正)이 실시되어 ‘일주’를 산이나 천으로 고쳤다. 이에 따라 금주(衿州)는 금천(衿川)으로, 과주(果州)는 과천(果川)으로 바뀌게 되었다. 현재의 동작구 전지역은 과천현 상북면과 하북면에 속하였다. 특히 이 두 면은 과천현 전체 인구의 33%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한강의 동작진을 통해 사당동을 거쳐 남태령으로 통하던 삼남대로 변에 마을이 위치하고 있었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따라서 조선 말기까지만 해도 현재의 대방동길보다는 동작동을 거쳐 사당동으로 가는 길이 중심로였음을 알 수 있다.
1795년(정조 19)에는 행정명칭의 변화가 있었는데, 금천이 시흥(始興)으로 변경되었다. 이후부터 금천이라는 명칭은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으며, 현재까지 시흥이라는 명칭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또한 시흥군에 속한 과거 상도리(上桃里)의 표기가 다시 상도리(上道里)로 개칭되었다. 한편 과천현 상북면에 속해 있던 동작리(銅雀里)는 현내면(縣內面)으로 통합되었다. 현재의 장승배기를 기점으로 시흥군과 과천현이 경계를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현재는 같은 동작구에 속해 있으나 이러한 행정구역의 분할은 정조 이전부터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현재의 동작구 대부분은 과천현 하북면에 속해 있었고 특히 이 지역에서 옹기를 굽고 판매가 이루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1895년(고종 32)에는 칙령 98호로 지방행정제도와 명칭이 개혁되었는데, 이때 동작구가 속해 있던 지역인 과천현은 과천군으로 바뀌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에는 조선총독부령 제11호 「도의 위치 · 관할구역 및 부군명칭 · 위치 · 관할구역 변경」에 따라 행정구역 개편이 실시되었는데, 이때 과천군에 속해 있던 동작구 지역은 시흥군 북면으로 통폐합되어 자연부락 단위로 설정되어 있던 마을들이 행정단위로 정착하게 되었다.
1920년대에 들어와서는 영등포에 있던 북면사무소가 영등포의 읍 승격과 함께 노량진으로 이전하였으며,1936년에는 사당동을 제외한 동작구 전 지역이 경기도에서 경성부로 편입되었다. 1936년 4월 1일부터 시행된 부령 제8호 「부군의 명칭 · 위치 · 관할구역 개편」에 의거하여 이들 지역도 서울이라는 행정구역의 일원이 되어 영등포출장소가 관할하게 되었다. 이때 사당리는 시흥군 신동면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1943년 부령 제1163호에 의해 출장소제도가 폐지되고 구제로 바뀌게 되면서 사당동을 제외한 동작구 전지역이 영등포구에 편입되었으며, 동의 명칭도 정(町)으로 명명되었다.
광복 후인 1946년에는 일본식 동의 명칭인 정(町)이 원래의 동(洞)으로 환원되었으며, 1949년 8월에는 대통령령 제159호에 의해 서울특별시 행정구역 확장이 이루어져 경기도 시흥군 동면의 번대방리가 영등포구로 편입되게 되었다. 그리고 사당리는 1962년 12월에 공포된 서울특별시조례 제276호에 의해 영등포구 신동출장소로 편입되었다.
1973년 7월 1일에는 대통령령 제6548호에 의해 영등포구에서 관악구가 분구되었고, 관악구는 영등포구의 동쪽 지역을 분할하여 현재의 동작구 전지역과 봉천동 · 방배동 · 신림동을 포함한 지역이 되었다. 이후 1980년 4월 1일 대통령령 제9630호에 의해 관악구를 분구하여 동작구가 신설되었다.
동작구는 구 전체가 거의 주택지대로, 흑석동 · 본동 · 노량진동 일대는 개발연대가 오래된 주택이 많은 재개발지역이다. 상도동은 1960년대 초반, 서울에서 최초로 국민주택단지로 개발한 곳이며, 사당동은 중산층 주택지로 개발되었다. 또한 구로공단과 인접한 신대방동 일부에는 공업지대가 형성되어 있다. 한편 본동에 사육신묘(死六臣墓), 동작동에 국립묘지가 있어 쾌적한 주거환경을 이루고 있다.
동작구에 자리한 국가유산으로는 사육신 묘, 양녕대군 이제 묘역, 창빈 안씨 묘역, 효간공 이정영 묘역, 조석견과 완성군 이귀정 묘역(서울특별시 기념물, 2001년 지정), 부안군 이석수 묘역, 동래 정씨 임당공파 묘역, 독립투사 강우규(姜宇奎)를 비롯한 178위(位)의 애국지사 묘가 있는 충렬대 등이 있다. 수죽정공 신도비와 제곡정공 신도비는 각각 1984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으나 2008년 지정해제되었다. 사육신 묘는 1972년, 양녕대군 이제 묘역은1972년, 창빈 안씨 묘역은 1983년, 효간공 이정영 묘역은 1994년, 동래 정씨 임당공파 묘역은 1984년에 전부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부안군 이석수 묘역은 2005년 서울특별시 문화재자료(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었다.
불교 유산으로는 사자암 지장시왕도(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2005년 지정), 지장사 철불좌상(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1991년 지정)이 있다. 사자암 소장 불화로 지장시왕도, 신중도, 영산회괘불, 현왕도는 19세기 후반 서울 · 경기 지역 불화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지장사 철불좌상은 고려시대 철제 여래좌상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용양봉저정(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1972년 지정)은 조선 정조가 부친인 사도세자(思悼世子)가 묻힌 화산(華山: 현재의 수원) 현륭원(顯隆園)에 거둥할 때 노들강[漢江]에 배다리[舟橋]를 놓고 건넌 다음, 잠시 어가(御駕)를 쉬기 위하여 지은 누정이다. 건조연대는 1879년(정조 13) 이후로 추정되고 있다.
한편 숭실대학교 한국기독박물관에는 청동기시대의 구리거울인 정문경(국보, 1971년 지정), 전 영암 거푸집 일괄(국보, 1986년 지정) 등 13점이 있고, 신석기시대의 빗살무늬토기가 소장되어 있다. 이밖에 19세기 후반 최한기가 제작한 지구의(보물, 1986년 지정)와 안중근의사 유묵(보물, 1972년 지정)이 있으며, 기상청에는 금영 측우기(보물, 1971년 지정), 대구 선화당 측우대(국보, 2020년 지정)가 소장되어 있다.
노량진동에는 민절서원(愍節書院) 터와 사충서원(四忠書院) 터가 있다. 민절서원은 사육신의 위패를 모셨던 곳인데, 1871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사충서원은 1721년(경종 1) 신임사화(辛壬士禍) 때 죽임을 당했던 노론 4대신 김창집(金昌集) · 이건명(李健命) · 조태채(趙泰采) · 이이명(李頤命)의 위패를 모셨던 곳인데, 1927년 지금의 용산구 보광동으로 이전하였다.
본동에 있었던 노강서원(鷺江書院)은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 때 죽임을 당했던 정재(定齋) 박태보(朴泰輔)의 위패를 모셨던 곳이다. 6.25 한국전쟁 때 훼손되었다가 1968년 의정부 수락산 자락에 복원되었고, 본동에는 다만 노강서원터 표지판이 설치되어 있다.
그밖에도 동작구에는 북청사자놀음, 종묘제례, 유기장 등이 전해지고 있다. 북청사자놀음은 1967년에 국가무형문화재(현, 국가무형유산)로 지정되었고, 종묘제례는 1975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유기장은 1983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동작구는 예로부터 충신들이 많이 배출된 충효의 고장이며, 다양한 문화축제를 통해 전통과 현대가 함께 하는 수준 높은 문화의 향연이 펼쳐지는 곳이다.
교육기관으로는 2015년 현재 초등학교 21개교, 중학교 16개교, 고등학교 7개교, 특수학교 2개교가 있고, 중앙대학교, 숭실대학교, 총신대학교 등 3개 대학과 대학원 29개가 있다. 서울삼성학교는 청각장애인 특수학교, 광성해맑음학교는 장애인 특수학교이며, 직업학교로는 한국직업전문학교, 원화직업전문학교, 한독간호학원, 소망직업학교가 있다.
동작문화복지센터, 사당문화회관에서는 문화교실을 실시하여 사회교육에 앞장서고 있으며, 동작도서관과 동작구 사이버어학당, 사이버도서관이 운영되고 있다.
문화시설로는 공연장, 문화의집, 전시관, 영화관, 도서관 등을 비롯하여 지역문화 증진을 위해 활동하는 동작문화원과 동작문화복지센터가 있다. 구민회관 대강당은 종합공연장 구실을 하여 연극 · 영화와 음악회 공연이 있는데 특히 보라매공원 내에 위치하여 주민들의 복합 문화생활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또한 사당문화회관은 안면도에 동작휴양소와, 경기도 화성시에 동작추모의 집(납골시설)을 운영하고 있다.
지역언론기관으로는 동작구구보, 동작구소식, 동작인터넷방송, 동작구뉴스매거진이 있다. 이밖에 동작구에는 구립합창단이 조직되어 정기적으로 공연을 열고 있으며, 2005년에는 동작소년소녀합창단이 창단되어 활동하고 있기도 하다.
이밖에 동작구에 위치한 여성사 전시관은 여성의 삶의 역사를 다룬 전문전시관이며, 숭실대학교 기독교박물관, 중앙대학교 박물관 등이 박물관 · 미술관의 기능을 하고 있다.
체육시설로는 보라매공원 내에 위치한 동작구민체육센터가 있어 골프, 체육관, 헬스장, 수영장 등 다목적실을 갖추고 있고, 흑석체육센터는 수영장, 체육관, 관람석을 갖추고 있다.
사당동에는 관운장묘인 남묘(南廟)가 있다.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서울에는 4개의 묘가 세워지게 되었는데, 이 중 하나가 남관왕묘(南關王廟)이다. 이밖에 동작구에는 본동 용궁당, 노량진1동 서낭당과 부군당, 노량진2동 대방(大方)장승, 상도1동 서낭당, 상도1동 도당, 흑석1동 도당, 흑석2동 산신당, 흑석동 산신제 등 국가와 마을의 안녕과 개인의 구복을 비는 용궁당(龍宮堂), 도당(都堂), 산신제(山神祭)가 전해지고 있다.
동작구에는 박태보(朴泰輔)가 노강서원(鷺江書院)에 모셔진 일과 관련해 전해지는 설화가 있다. 설화는 다음과 같다. 박태보는 어려서부터 슬기로웠으며, 얼굴이 남중일색(男中一色)이었다. 어느 날 참판 이종엽(李宗燁)의 집 심부름하는 여인 하나가 그의 아름다운 모습에 반하여 박태보의 유모에게 이 사실을 알리자, 유모가 그 사정을 딱하게 여겼으나 박태보의 심지가 곧으므로 차마 입을 열어 볼 수가 없어 그의 모친에게 이야기를 해보았다. 그의 모친 역시 그 여인의 짝사랑을 동정하여 남편 서계공(西溪公)에게 아들을 좀 달래보라고 청하였다. 그리하여 그 부친이 박태보를 불러 여인에게 한을 남기면 앞으로의 길에 장애가 될 것이라 훈계하였고 박태보도 부친의 뜻을 거역하지 못 하였다. 그 여인은 박태보의 양친을 뵙고 스스로 머리를 쪽지어 출가한 부녀처럼 하고 다녔다. 세월이 흘러 박태보가 뛰어난 재주로 벼슬길에 올랐고, 여인은 그의 기억에서 차츰 멀어졌다.
1689년(숙종 15) 중전에 대한 장희빈의 끈질긴 모함이 성공하여 왕이 중전을 폐비하려 하자, 직언(直言)을 잘 하던 박태보는 붓을 들어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진도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그러나 귀양지로 가는 길에 국문시 입은 장독(杖毒)과 화상(火傷)이 심해 친구 집에 있는 노량진에 머무르게 되었다. 이때 어느 여인이 찾아왔는데 그 방문객은 바로 예전 박태보를 사모했던 그 여인이었다. 박태보는 멀어져가는 정신을 간신히 수습하여 겨우 손을 들어 여인의 손을 한 번 꽉 잡은 다음 그만 목숨이 다했다. 여인은 그 앞에서 울고 또 울다가 일어나 나갔는데, 이후 인현왕후가 복위되고 노강서원이 완성되던 날, 그 여인은 소복을 입고 서원 뒤 서까래에 목을 매어달아 싸늘하게 죽어갔다고 전해진다.
동작구는 전체면적이 16.35㎢로 이 중 4.2%가 녹지지역이다. 상업지역은 1.7%에 불과하고 94.1%가 주거지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동작구는 시가지역 또는 풍치림(風致林), 공원 등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농업은 물론 산업도 특기할 만한 것은 없다.
구로공단과 인접한 신대방동 일부에는 공업지대가 형성되어 있는데 한국모방, 태평양화학, 신화방직, 유한양행 등의 큰 공장이 있고, 이외에 전기 · 전자기구공장이 있다. 1973년 「농수산물 도매시장법」에 따라 노량진 수산시장이 수도권 지역의 수산물 판매, 저장, 가공시설을 모두 갖추게 되었다. 서울에서 거래되는 전체 수산물 중 49.5%의 물량이 이곳에서 거래되고 있다. 최근에는 일본인 관광객 등이 연간 1만여 명이나 찾아오는 국제적인 시장으로 발돋움하고 있다. 현재도 노량진 전철역은 시내버스와 전철을 갈아타는 대표적인 곳으로 가장 붐비는 전철역의 하나이지만 이 지역을 중심으로 입시학원과 고시학원 등이 밀집되어 있다.
1900년(광무 4)에 한강철교가 준공되고 경인철도가 개통되면서 동작구 지역에서 나루는 점차로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1910년 용산구 한강로와 동작구 본동을 잇는 한강대교(제1한강교)가 건설되었고, 한국전쟁 이후 한강인도교가 가설되었으나 영등포구 · 구로구 · 동작구 등 강남 지역의 도시 확장과 인구 증가에 따라 1981년 한강대교가 건설되었다.
동작대로는 서울 남북을 가로질러 남부순환로와 이어져 경부고속도로에 진입할 수 있으며, 상도터널이 한강대교와 일직선으로 뚫리면서 도심과 원활한 교통이 이루어졌다. 또한 용산구 이촌동과 동작구 동작동을 잇는 동작대교가 건설됨으로써 전철 복선 차도가 중앙에 설치된 중앙부 전철교 위로 지하철 4호선이 운행된다. 이 지역에는 여러 교량이 있어 한강 이북과의 교통을 원활하게 연결해주는 한편, 구 내외를 동서남북으로 연결해 주는 도로들이 구내를 원활히 연결해 주고 있다.
시흥대로는 신대방동을 통과하여 남쪽의 경수산업도로와 이어진다. 한편 동작구에는 구 내외를 동서남북으로 연결해주는 대방로, 현충로, 노량진로, 관악로, 상도동길, 신림로, 사당로, 장승배기길, 강남3로, 강남4로, 올림픽대로 등이 있다.
동작구에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한 수호지사를 모신 국립현충원과 조선시대 충신의 상징인 사육신묘가 있고, 옛날 선조들의 수호신인 장승이 서 있던 마을 장승배기, 양녕대군이 올라가서 국사를 걱정했다는 국사봉, 정조가 사도세자 묘역을 참배할 때 강을 건너 잠시 쉬어가던 용양봉저정, 우리나라 철도의 시발지인 노량진역 등 수많은 명소가 위치하고 있다.
또한 사육신 추모제향, 장승배기 장승제, 노들 한마당축제 등 구민과 함께 어울리는 다양한 문화축제를 통해 전통과 현대가 함께 하는 수준 높은 문화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다. 아울러 동작구에는 노량진중앙시장, 사당시장, 사당중앙시장, 삼거리시장 등 14개의 민속시장이 있다. 노량진역을 중심으로 북쪽으로 노량진수산시장, 남쪽으로 노량진중앙시장, 동쪽으로 사육신묘, 서쪽으로 학원가가 자리하고 있으며, 학원가를 중심으로 음식점과 기타 서비스 관련 산업이 활발하다.
한편 사육신추모제향이 매년 개최되는데, 사육신의 충절과 드높은 선비정신을 기리는 전야제 행사로 사육신의 혼을 부르고 영혼을 달래는 살풀이춤, 사물놀이굿, 판소리, 단종 복위 모의과정을 재연한 무용극 등 다양한 문화행사가 열린다. 장승배기 장승제도 매년 개최되는데 일제가 철거한 장승을 동민이 다시 세우고 장승제를 지내는 민속을 되살리는 전통놀이이다. 아울러 동작구민의 날 축제, 구민노래자랑(노들가요제), 구민체육대회 등 다채로운 문화행사가 열린다.
동작구 북쪽에 위치한 동이다. 서쪽은 대방동, 동쪽은 본동, 남쪽은 상도동, 북쪽은 한강과 이웃하며 용산과 접해 있다. ‘백로(白鷺)가 노닐던 나루터’라는 뜻에서 동명이 유래되었다. 1943년 영등포구에 속하게 되었고, 1973년 관악구를 거쳐 1980년 동작구에 편입되었다. 노들나루 곧 노량진이 있음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마을이었는데, 최초의 근대식 교량인 한강철교와 인도교가 놓임으로써 크게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노량진수산시장은 수산물 전문도매시장으로 서울 및 수도권에 수산물을 원활히 공급하고 있고, 최근에는 일본인 관광객 등이 연간 1만여 명이나 찾아오는 국제적인 시장으로 발돋움하고 있다. 노량진역 주위에는 많은 입시 · 고시학원들이 들어서 있다.
국가유산으로는 단종의 복위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충신 6인을 모신 사육신 묘가 있다.
동작구 중앙에 위치한 동이다. 동쪽은 흑석동, 서쪽은 대방동과 신대방동, 남쪽은 관악구 봉천동, 북쪽은 노량진동과 접해 있다. 오래전 이 지역에 상여꾼들이 집단으로 거주하여 ‘상투굴’이라고 부른 데서 동명이 유래하였다. 1943년 영등포구역소 관할 아래 있다가 1946년 상도동으로 바뀌었고, 1973년 관악구 소속으로 되었으며, 1980년 동작구로 이관되었다. 동서로 횡단하는 상도동길과 장승배기길, 관악로 등이 있으며, 한강대교 확장과 함께 준공된 상도터널이 도심과 상도동을 직선으로 연결하고 있다. 상도2동 영도시장 맞은편 삼거리 일대를 장승배기라고 하는데, 이정표 역할을 하던 장승이 있었던 곳이다.
국가유산으로는 양녕대군의 사당인 지덕사(至德祠)와 그의 묘가 있으며, 미륵암(彌勒庵), 사자암(獅子庵), 약수암(藥水庵) 등의 사찰이 있다.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은 구의 문화유산의 보고로 7천여 점의 기독교, 고고학, 민족 운동 등의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소장품 중 국보급 유물인 전 영암 거푸집 일괄, 정문경, 보물급인 안중근의사 유묵, 지구의가 소장되어 있으며, 3·1운동 당시의 3·1운동 독립선언문, 숭실대학교 교정에 게양했던 태극기 등을 비롯하여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와 그 목판 등 귀중한 유물이 기독교문화실, 고고실, 기독교미술실, 독립운동기념실에 나누어 전시되어 있다.
동작구 북쪽에 위치한 동이다. 한강대교의 남안(南岸) 지역으로 동쪽은 흑석동, 서쪽은 노량진동, 남쪽은 상도동, 북쪽은 올림픽대로와 한강에 접해 있다. 조선시대부터 오랫동안 불리어오던 자연부락 이름으로 노량진(鷺梁津)의 ‘원마을’이라는 뜻에서 동명이 유래되었다.
1943년 영등포구에 속하게 되었고, 1973년 관악구를 거쳐 1980년 동작구 신설로 편입되었다. 용산구 한강로와 이 동을 잇는 한강대교가 있고, 현충로가 동서로 지나며, 노량진로가 영등포로터리까지 이른다. 한강대교 남쪽 강변의 서쪽에 1910년 이래 2001년까지 노량진정수장이 있었으나, 지금은 그곳에 노들나루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공원안에는 노량진 정수장터 표석과 배수지 시설만 남아 있다.
국가유산으로는 용양봉저정, 한강수사자조혼비(漢江水死者弔魂碑)가 있다.
동작구 동북쪽에 위치한 동이다. 한강대교와 동작대교 사이의 남쪽에 있으며, 동 · 서 · 남쪽의 3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동쪽은 동작동, 서쪽은 본동, 남쪽은 상도동, 북쪽은 한강과 접해 있다. 흑석1동사무소 남쪽 일대에서 나오는 돌의 빛이 검은색을 띠어 ‘검은돌[黑石]’ 마을이라 한 데서 동명이 유래되었다.
1946년 흑석동으로 바뀌었고, 1973년 관악구 관할로 되었으며, 1980년 동작구로 이관되었다. 한강대교 남단을 시작으로 하는 현충로가 동서로 지나고, 북쪽 강변으로는 올림픽대로가 지난다.
문화유적으로는 중앙대학교 입구 한강변 언덕에 효사정문학공원이 조성되어 있으며, 효사정(孝思亭) · 학도의용병현충비(學徒義勇兵顯忠碑) · 심훈 좌상과 심훈 문학비 등이 있다. 흑석시장 뒤편에는 조석견과 완성군(莞城君) 이귀정 묘역이 있다.
동작구 동쪽에 위치한 동이다. 동쪽은 서초구 반포동, 서쪽은 흑석동 · 상도동, 남쪽은 사당동, 북쪽은 흑석동과 한강에 접해 있다. 조선시대에 용산(龍山)에서 수원(水源)으로 통하는 나루터의 하나였던 동작진(銅雀津), 즉 ‘동재기나루터’라고 부른 데서 동명이 유래되었다.
1946년 동작동으로 바뀌었고, 1973년 관악구 관할로 되었으며, 1980년 동작구로 이관되었다. 조선시대 동작진이 있던 자리에 동작대교가 놓여 강남과 강북을 이어주고, 동작대로가 사당사거리를 거쳐 경기도 과천시와 연결된다. 올림픽대로는 동작대교에서 출발하여 노량진을 거쳐 여의교로 이어진다.
국립현충원(國立顯忠院)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순국한 호국영령들이 잠들어 있는 민족의 성역으로 1965년 국립묘지로 승격되었다. 현충원 내에 창빈 안씨 묘역이 있고, 1983년 화장사(華藏寺)를 개칭한 호국지장사(護國地藏寺) 내에는 지장사 철불좌상이 있다.
동작구 동남쪽에 위치한 동이다. 동쪽은 관악구 봉천동, 서쪽은 서초구 방배동, 남쪽은 관악구 신림동, 북쪽은 동작동과 접해 있다. 옛날 큰 사당이 있었던 마을인 데서 동명이 유래하였다.
1963년 서울특별시에 편입되면서 사당동으로 바뀌었다. 1973년 관악구 관할로 되었으며, 1980년 동작구 신설로 이에 속하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동래정씨(東萊鄭氏) 문중이 대대로 살고 있었는데, 현재도 정씨 문중의 신도비가 남아 있다.
사당로와 동작대로가 지나며, 사당사거리는 동작구 · 서초구 · 관악구가 나누어지는 곳인데, 지하철 2·4호선의 사당역이 있고, 서울특별시와 경기도를 이어주는 교통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
동래정씨 임당공파 묘역은 조선시대 석비(石碑)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며, 수죽정공 신도비는 17세기 고비(古碑)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제곡정공 신도비는 백헌(白軒) 이경석(李景奭)이 글을 짓고 글씨도 썼다. 또 조선 후기의 문신인 효간공 이정영 묘역도 있다. 그 밖에 180번지에는 관우(關羽)의 사당인 남묘(南廟)가 있다. 한편 삼일공원은 3·1운동 당시 여성 참가자들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공원이다.
동작구 서쪽에 위치한 동이다. 동쪽은 노량진동 · 상도동, 남쪽은 신대방동, 서쪽은 영등포구 신길동, 북쪽은 한강을 경계로 여의도와 접하고 있다. 성남중고등학교 운동장에는 용마(龍馬)가 났다는 용마우물이 있고, 학교 뒷산을 용마산이라 하는데, 용마우물에서 용이 나와 산으로 올라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943년 영등포구 관할로 되었다. 1973년 관악구 관할로 바뀌었고, 1980년 동작구 신설로 이에 속하게 되었다. 1970년부터 개발되기 시작하면서 공업지대로 발전하였으나 현재는 유한양행 등 많은 공장들이 다른 지역으로 이전되었고 대단위 아파트단지가 형성되어 주거지역으로 탈바꿈하였다.
동작구 서쪽에 위치한 동이다. 동쪽은 관악구 봉천동과 상도동, 서쪽은 구로구 신도림동, 남쪽은 관악구 신림동, 북쪽은 대방동과 영등포구 신길동에 접해 있다. 대방동 근방의 새로 생긴 마을인 데서 동명이 유래하였다.
1949년 영등포구에 편입되었고, 1973년 관악구 신설로 이에 속하게 되었다. 1975년 동의 일부가 영등포구 신길동에 편입되었고, 1980년 동작구로 이관되었다. 조선시대에는 농업과 어업으로 생계를 유지해온 서민층 마을로 띄엄띄엄 자연부락이 형성되었던 곳이다.
1957년 공군대학이 처음 들어서고 1958년 공군사관학교가 이 마을에 세워지면서 군사마을로 알려지게 되었다. 또 이 마을은 저지대이고 도림천이 있어 수원(水源)이 좋아 원풍모방, 태평양화학, 중외제약 등 많은 공장이 들어서 한때는 영등포구, 구로구 다음 가는 공업지대였다. 현재는 대부분의 공장들이 다른 지역으로 이전되어 주거지역으로 바뀌고 있다.
1985년 공군사관학교가 이전하면서 그 자리에 보라매공원이 조성되었다. 공원에는 보라매 시립병원, 구민회관, 장애인복지관 등이 있다. 또한 이 공원 주변에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이 운영하는 보라매병원과 백화점 등의 고층빌딩들이 자리하고 있으며, 1999년에는 기상청이 이곳으로 신축 이전되었다.
공군본부와 해군본부가 이전한 자리에는 아파트단지가 들어섰다. 343번지 일대에 있던 모자원(母子院)은 한국전쟁 이후 이승만 대통령이 미망인과 그 자녀들을 위하여 64가구의 주택을 마련해준 데서 붙여진 이름으로, ‘과부촌’이라고도 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