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쪽은 남동구, 서쪽은 황해, 남쪽은 경기도 시흥시, 북쪽은 남구에 접하고 있다. 동경 126°34′~126°42′, 북위 37°20′~37°26′에 위치한다. 면적은 54.95㎢이고, 인구는 35만 2172명(2019년 4월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14개 행정동(6개 법정동)이 있으며, 구청은 인천광역시 연수구 동춘동에 있다.
지형은 남구와의 경계를 이루는 문학산 줄기가 구의 북쪽을 동서로 달리고, 그 한 줄기인 청량산이 남쪽으로 이어져 이 지역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다. 마치 학이 날개를 펼친 형상으로 주변 일대에는 선학, 청학, 학익동 등 관련 지명이 다수 분포한다.
동쪽에는 승기천이 남동구와 경계를 이루며 흐르는데, 이곳은 과거에 큰 갯골이어서 주안지역까지 바닷물이 들어갔다. 그러나 현재는 주변일대가 모두 간척되어 연수구 쪽은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다.
청량산의 서쪽 과거 송도유원지 일대도 대부분 간척에 의해 형성된 땅이다. 본래 이 지역은 아파트단지가 들어서기 전에 벼, 보리, 콩 등 곡물이 많이 재배되던 곳이었으며, 청량산 서쪽 옥련 · 동춘동의 해안가는 수산물이 많이 생산되었고, 넓은 갯벌이 형성되어 패류의 보고였다. 현재는 대부분이 아파트 단지로 변했으며, 해안지역은 간척사업으로 인해 간척지가 계속 확장되어 송도 신도시 등이 들어설 예정이다. 오늘날 토지이용은 농경지가 12.9%, 대지 및 공장용지가 26.1%, 임야가 25.8%, 교통용지가 13.5%를 차지한다.
주요 산으로는 선학동과 남구 문학동 사이에 있는 문학산(213m), 동춘동과 청학동에 걸쳐있는 학익산이 있다. 연평균 기온은 12.9℃이고, 연평균 강수량은 1,307.5mm이다.
연수구는 문학산의 남쪽에 있으며 서쪽으로 황해와 맞닿아 있다. 문학산은 비류(沸流) 백제의 전설이 말해 주듯이 인천의 기원과 관련된 산이다. 이 산을 중심으로 바닷가에까지 이르는 지금의 연수구 일대는 이미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문학산 주변인 청학동 인근에서는 돌도끼와 돌칼, 돌화살촉 같은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의 유물들이 많이 발굴되었고, 특히 청동기시대의 대표적 유적인 고인돌도 나왔다. 또 문학산 남쪽의 연수동과 청학동의 경계 지역에서는 조개무지도 발견되고 있어, 신석기시대 이 지역에는 상당히 발달된 마을공동체가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연수구는 백제가 한강 하류까지 세력을 크게 확장하고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중국과의 외교정책을 추진하던 시기에, 두 나라 사이의 바닷길을 연결해 주던 전초 기지의 역할을 하였다. 그 정확한 위치가 어디인가에 대해서는 몇 가지 이견이 있지만, 지금 공원으로 복원되어 있는 능허대(凌虛臺) 일대가 바로 당시 백제의 사신들이 중국으로 떠나던 곳이었다는 것이 지배적인 의견이다. 이곳의 나루터와 백사장은 우리말로 한나루, 한자로는 대진(大津) 또는 한진(漢津)이라 불리었다. 백제가 중국과 교류를 시작한 것은 372년(근초고왕 27)으로 그 뒤 백제가 멸망할 때가지 계속되었는데, 이중 능허대를 통해 사신을 파견한 기간은 근초고왕 때부터 개로왕 때까지 100여 년 동안이다. 사신들은 이곳까지 오기 위해 수도인 위례성을 떠나 지금의 남동구 만수동 일대의 별리현(別離峴)을 넘은 뒤, 문학산의 사모지고개(현 삼호현)를 거쳐 능허대로 왔다고 한다.
인천 지방의 대표적인 호족인 인천이씨는 대대로 문학산 주변인 지금의 연수동, 선학동 주변에 뿌리를 내리고 살았다. 이 집안의 선조는 원래 가야국 수로왕의 둘째 아들이었다고 하며, 이 때문에 이전까지는 어머니의 성을 따서 대대로 허(許)씨 성을 썼다고 한다. 그러나 연구자들에 따라서는 이 같은 이야기보다 고려 인종 때 문정공 이지저(李之氐)가 지은 「이공수묘지명(李公壽墓誌銘)」 등의 기록에 따라 이 집안의 선조를 황해도 신천(信川) 지역에 살던 기평(奇平)이라는 사람으로 보기도 한다. 그가 8세기 전기에 소성(邵城: 지금의 인천) 태수로 부임한 뒤부터 연수구 지역에 터를 잡고 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인천이씨가 가장 흥성한 것은 고려 문종 때부터 예종대를 거쳐 인종대에 이르는 80여 년 간이었다. 이들 7대의 임금을 거치는 동안 인천은 왕가의 외향이거나 왕비의 내향이었기 때문에 당시 ‘7대 어향’(七代御鄕)으로도 불리었다.
조선시대의 인천은 처음에 인주(仁州)라는 지명이었으며, 1413년(태종 13) 지금의 이름인 인천으로 개칭되었다. 1460년(세조 6)에는 인천도호부로 승격되는데 도호부 청사가 남구 관교동에 설치되었기 때문에 지금의 연수구 지역에서는 특별한 역사적 사건이 없었다. 다만 조선시대 초기부터 지금의 연수구 곳곳에 많은 집안들이 이주해 와 자리를 잡고 마을을 형성했다고 한다.
그중 가장 큰 집안이 동춘동 일대에 자리 잡은 연일정씨(延日鄭氏)였다. 이 가문이 인천에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조선 중기인 명종, 선조대에 효릉(孝陵) 참봉을 지낸 정제(鄭濟)라는 인물이 이곳에 내려온 뒤부터라고 한다. 그 뒤 이 가문에서는 영조 때 우의정을 지낸 정우량(鄭羽良)과 그의 동생 정휘량(鄭翬良)을 비롯해 많은 판서와 정승들이 나오며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이 밖에도 동춘동의 곡부공씨, 청학동의 경주최씨, 반남박씨, 진주김씨, 옥련동의 전주이씨와 덕수이씨, 선학동의 부평이씨 등이 종족촌락을 이루고 살기 시작했다.
조선시대에 인천도호부가 관할한 지역은 모두 10개 면이었는데, 지금의 연수구 지역은 대부분 먼우금면에 속했다. 지금의 청학동, 옥련동, 동춘동, 연수동 등이 모두 먼우금면에 속해 있었고, 문학산 동쪽인 선학동 지역만 도호부에서 직접 관할하는 부내면에 들어갔다. 당시의 먼우금면은 옹암리, 먹암리, 망해리, 동막리, 척전리, 한진리, 함박리, 대아도리, 소아도리, 야동, 옥동 지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중 동막이나 척전, 함박 등은 지금의 땅이름에도 그대로 남아있다. 먼우금은 먼너금, 먼오금이라고도 하며 한자로는 원우금(遠又今) 또는 원우이(遠又爾)라 적는다. 이는 ‘멀고 또 가깝다’는 뜻으로 바닷가이고 큰 갯골이 있어 ‘배로 다니면 가깝지만 걸어서 다니면 멀다’는 뜻이라고도 하고, ‘가도 가도 멀다’는 뜻이라고 하여 연수구의 과거의 지리적 특징을 잘 대변하였다고 볼 수 있다.
조선왕조가 을사보호조약 체결로 국권의 대부분을 잃은 뒤 1906년 인천 지역에서도 일본인들에 의한 행정조직 개편 작업이 벌어졌다. 이때 먼우금면은 서면(西面)으로 개칭되었는데, 이곳이 인천 구읍(舊邑)의 서쪽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1914년에는 전국적인 지방행정구역 조정에 따라 지금의 자유공원 일대(개항장 일대)만이 인천부로 남고 나머지 인천과 부평 지역은 새로 만든 부천군에 편입되었다. 이때 연수구 전 지역은 부천군 문학면 관할로 들어갔는데, 당시 이곳은 옥련리, 도장리, 연수리, 청학리, 동춘리로 나뉘어져 있었다.
1936년 10월에는 일제가 인천부의 행정구역을 확장하며 문학면의 일부였던 옥련면을 인천부에 편입시키고 이름도 송도정(松都町)이라는 일본식으로 바꾸었다. ‘송도’는 일본인들이 즐겨 쓰는 이름으로, 일본은 물론 우리나라에만도 국내 50여 곳에 동일한 지명이 확인된다. 이 무렵 일본인들은 이곳 옥련동 해변에 송도유원지를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한 평에 5전 했던 이 일대의 지가가 단숨에 510원까지 오르는 등 투기가 크게 유행하였다고 한다. 이어 1937년 수원인천 간을 운행하는 수인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유원지를 오가는 정거장의 이름도 송도역이라고 붙여졌다. 이 송도유원지와 송도역이라는 지명 때문에 지금까지 옥련동 일대는 송도라는 이름으로 통칭되고 있다.
1943년에 인천부 문학출장소가 새로 설치되었으며 연수구는 문학출장소의 관할로 들어갔다. 광복 이듬해인 1946년에는 송도정을 옥련동으로 바꾸는 등 그동안 일본식으로 되어 있던 마을 이름들을 상당 부분 우리말로 고쳤기 때문에 오늘날의 지명을 갖게 되었다. 1968년에는 인천시의 구제(區制) 실시로 연수구 지역은 인천시 남구에 속하였고, 1980년대 후반까지는 커다란 변화가 없이 한적한 시골의 풍경을 많이 간직하고 있는 곳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1987년 정부가 서민들의 내 집 마련을 위한 주택 대량 보급과 계획적인 도시 개발을 내세우며 연수동, 청학동, 동춘동, 선학동 일대의 185만 6000여 평에 택지개발사업을 시작하면서 연수구의 모습은 완전히 바뀌기 시작했다. 16만 6000명의 인구를 수용한다는 목표로 토지개발공사가 시행한 이 연수택지개발지구사업에 따라 조용한 농촌 지역이 불과 몇 년 만에 대단위 아파트촌으로 완전히 탈바꿈한 것이다. 인구도 빠르게 증가하여 택지개발사업이 마무리된 1994년에는 이곳을 포함한 남구의 인구가 58만 명에 육박하였다. 그리하여 같은 해 7월 남구 조례에 따라 연수동은 연수 1동, 연수 2동, 청학동 등 3개 동으로 나뉘어졌다. 하지만 몇 개 동의 분동(分洞) 정도로는 급속히 증가하는 인구와 그에 따른 행정 수요를 감당할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연수구는 1995년 3월 1일로 남구에서 분구(分區)되었다. 분구 당시 연수구는 옥련동, 선학동, 연수동, 청학동, 동춘동 등 5개의 법정동과 옥련 1동, 선학동, 연수 1동, 연수 2동, 연수 3동, 청학동, 동촌 1동, 동춘 2동 등 8개의 행정동을 관할 구역으로 하고 있었다. 그 뒤로도 인구는 계속 늘어나 분구 이듬해인 1996년 1월 구 조례에 따라 동춘 2동이 동춘 2동과 청량동으로 나뉘어졌으며, 2003년에는 옥련동이 옥련 1동과 옥련 2동으로 나뉘어졌다. 2007년 1월 1일 동춘2동에서 송도동이 분리됨에 따라 오늘날 연수구는 모두 11개의 행정동을 관할하게 되었다.
옥련동 인천시립박물관에는 원대 철제 범종, 송대 철제 범종, 관음좌상, 목조여래좌상, 목조보살좌상 등의 불교 유물이 소장되어 있다.
먼저 원대 철제 범종(元代鐵製梵鍾)은 1982년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이 범종은 1298년(원나라 성종 3)에 주조된 것으로 중국 종 특유의 모양을 갖추고 있다. 범종은 일반적으로 용유, 종신, 하대 등 세 부분으로 나뉘는데, 이 종은 용유부의 두 마리 용이 사실적으로 조각되어 있는 동적인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다. 용유와 종견 사이에는 당초문이 양주되어 있으며, 당초문 사이에는 8개의 구멍이 뚫려 있다. 이 범종이 인천 지역에 유입된 경위는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일제가 부족한 철의 조달을 위해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 각지에서 철제를 공출하여 부평 조병창에 야적하였으나 종전되면서 그대로 철수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1982년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송대 철제 범종(宋代鐵製梵鍾)은 명문이 마모되어 정확한 주조 연대를 확인할 수 없으나 형태, 의장 등을 고려해 볼 때 당의 양식을 반영한 송나라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쌍용이 조각되어 있는 용유는 오랜 시간 속에 다소 마모되기는 하였지만 웅장한 분위기를 주고 있다. 종신의 윗부분에는 화려한 장식문이 장식되어 있고 중간과 하단에는 가사문대가 양주되어 있다.
1982년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관음좌상(觀音坐像)은 보살 중에서도 관음보살에 속하며 제작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형태로 보아 중국 명 또는 청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머리에는 구슬로 장식한 보관을 쓰고 가슴에는 화려한 목걸이를 하고 있으며, 왼쪽 어깨에 흘러내린 천의는 지면까지 흐르고 있다. 또한 오른쪽 어깨에서 시작된 천의 자락은 가슴을 거쳐 무릎 위 손목을 덮고 양련형(연꽃잎이 위로 향한 것) 대좌 위까지 흐르고 있다. 대좌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은 오른 무릎을 세우고 그 위에 오른손을 편안히 올려놓았으며, 왼손은 지면을 짚고 있어 전반적으로 평온한 느낌을 주고 있다.
목조여래좌상(木造如來坐像)은 1990년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여래상은 석가여래상의 준 말로 불교 창시자인 석가모니를 형상화한 것이다. 인천시립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는 이 여래상은 좌상으로, 손이 훼손되어 손의 모양은 확인할 수 없으나 선정인(가부좌일 때 취하는 것으로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하여 배꼽 높이에 놓고 오른손은 펴서 손가락을 위로 하여 왼쪽 위에 겹쳐 놓되 두 엄지손가락을 서로 대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고려시대의 불상 양식을 반영하고 있지만 조선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목조보살좌상(木造菩薩坐像)은 1990년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이 불상은 왼손이 훼손되어 수인(손 모양)은 알 수 없으나 조각 기법과 그 모습 그리고 전체적인 분위기로 보아 조선시대 때 제작된 보살임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숭유억불 정책을 일관함으로써, 물론 왕실이나 시민들 사이에 불사나 예불은 계속되어 불상의 조성도 필요하였으나 개인의 복을 염원하는데 지나지 않았으므로, 불교가 융성했던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에 조성된 세밀하고 화려하여 예술적 아름다움을 간직한 불상 양식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조선시대에 제작된 이 보살상에는 화려함이나 세밀함은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머리에는 두건을 쓰고 미간에는 백호가 있으며 얼굴에는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아 세기가 부족하고 투박한 느낌을 주고 있다. 이는 조선시대 불상양식에서 찾아볼 수 있는 특징으로 이 보살상이 조선시대에 제작된 것임을 나타내는 것이라 하겠다.
유교유물로는 시립박물관에 소장된 김재로 영정, 동춘동 325번지에 소장되어 있는 정우량 영정, 이허겸 재실 등이 있다.
정우량 영정(鄭羽良影幀)은 1986년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정우량(1692~1754)의 자는 자휘, 호는 학남이다. 1723년(경종 3) 증광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간 후 대사성, 좌승지,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을 지냈다. 특히 1728년(영조 4)에는 왕의 교지를 지어 한글로 번역해 각 도에 보내기도 하였으며, 경기도 개성 지역과 인천 연수구 연수동에 그가 지은 신도비가 있다. 현재 동춘동 후손이 보관하고 있는 그의 초상화는 측면을 향하고 있는 얼굴 부분을 제외하고는 전체적으로 정면을 향한 좌우대칭 구도를 이루고 있으며 복식, 윤곽, 옷의 주름 등을 세심하게 묘사하고 있다. 또한 채색 방법은 수용성 물감을 아교액과 조합하여 진한 색채로 사실적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다.
인천이씨 중시조인 이허겸 재실 원인재(源仁齋)는 1990년 인천광역시 문화재자료(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었으며 연수동에 소재한다. 팔작지붕 형식인 이 건물의 건립연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32대손이 쓴 「원인재기」와 33대손이 쓴 「원인재 상량문」이 있는 것으로 보아 1807년(순조 7) 또는 1835년(고종 4)인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건물의 명칭을 원인재라고 한 것은 인천이 인천(인주)이씨 각 파의 근원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건물의 본래 위치는 연수동 적십자 요양원으로 들어가는 좌측의 신지 마을에 있었으나 택지개발사업으로 인해 해체되어 인근에 위치하고 있는 그의 묘역으로 옮겨져 복원되었다.
능허대지(凌虛臺址)는 1990년 인천광역시 기념물 지정되었으며옥련동 194-54번지에 위치한다. 능허대는 백제가 중국 동진과 통교를 시작한 서기 372년(근초고왕 27)부터 옹진으로 도읍을 옮긴 475년(개로왕 21)까지 사신들이 중국을 왕래할 때 출발했던 나루터가 있던 곳이다.
각국 조계석(各國租界石)은 1990년 인천광역시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어 있으며 시립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조계란 일정한 지역범위 안에 외국인 전용 거주지역을 정하여 그 곳의 지방 행정권을 그들 외국인에게 위임한 지역을 말한다. 인천 관내에는 1883년 일본 조계를 시작으로 1884년 화상(청국) 조계, 각국 조계 등 3개 조계가 설정되었다. 이중 각국 조계는 우리나라와 미국, 영국, 청국, 일본, 독일(독일은 1885년에 가입함) 대표 사이에 체결된 「인천제물포 각국 조계청장정」에 따라 송학동, 송월동, 만석동 일대 약 14만평 규모로 설정되었다. 현재 시립박물관 야외에 전시(본래는 동구 내동 인천상공회의소 입구에 있었음)되어 있는 각국 조계석은 조계의 경계를 표시하는 기능을 하였던 것이다.
2015년 현재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4개교, 중학교 16개교, 고등학교는 15개교, 가천대학교 메디컬캠퍼스와 연일학교(특수학교)가 있다.
문화시설로는 연수문화원이, 전시시설로는 인천시립박물관이 있다. 이 외에 연수도서관, 연수세화종합사회복지관, 연수구 청소년수련관 등이 있다.
옥련동에는 20세기 초의 주거생활을 보여주는 이두호 가옥이 남아 있다. 이 고택은 1908년에 지었으며 건축 당시에는 ‘ㄱ’자의 안채만 세웠으며, 행랑채는 1930년대에 지었다. 인천광역시의 해안과 도서 지방에서는 흔히 안채만 짓고 살다가 뒤에 행랑채를 세운다. 또 안채에만 기와를 올리고 사랑채는 초가로 짓는데 이를 반기와집이라고 한다. ‘ㄱ’자 형태의 안채 평면은 우리나라 중부지방 상류가옥의 전형을 보인다. 2칸 장방의 안방 위쪽에 골방이 있고 건넌방 전면에 누마루(현재는 철거됨)를 붙인 점 그리고 부엌 남쪽에 찬광을 두고 한쪽에 나무광을 배치한 점 등이 그것이다. 특히 찬방 사이에 벽을 쳐서 마련한 나무광은 덕적도 등지의 도시지방 중상층 가옥에서도 눈에 띤다.
청학동에서 남구 문학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사모지 고개라고 하는데 이에 관한 설화가 전해진다. 『여지도서』에서는 이 고개를 삼해주현(三亥酒峴)이라고 적고 있다. 이 고개 위에는 큰 바위가 있었다고 한다. 그 바위 꼭지에는 구멍이 뚫려 있었는데, 옛날에 그 구멍에 삼해주가 가득 차 있었다는 것이다. 고개를 넘어가는 사람들은 고개를 오르느라 숨이 차고 목이 마르면 그 술을 떠 마셔 갈증을 풀었다. 그러나 그 술은 한 잔만 마셔도 능히 갈증을 풀 수 있는 술이었으므로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욕심을 부려 이를 지키지 않고 그 술을 한 잔 이상 마셨더니 그만 술이 말라 없어졌다고 한다.
옥련동과 청학동에 걸쳐 있는 청량산에 관한 이야기도 전해진다. 청량산은 송도유원지를 감싸고 있는 산으로 일명 청룡산, 청능산, 척량산 등으로 불리워지기도 한다. 『동국여지승람』에 이 산의 경관이 수려하여 이름을 청량산이라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청량산이란 이름이 올바른 이름이라 하겠다. 산 이름을 청량산이라 지은 사람은 고려 공민왕의 왕사였던 나옹화상이라고 전해져 오고 있다. 청량산은 원래 중국 산서성에 있는 유명한 산으로 그 본명은 오대산이라고 하는데 그 안에 청량사가 있고 이 사찰에는 화엄종의 육대조사이신 징관조사께서 머물렀으며, 유명한 스님들을 무수히 배출시켰다고 한다. 어느 날 정관조사께서 열반에 드시면서 내 법을 동쪽 해뜨는 작은 나라에서 꽃피울 것이라고 갈파했다고 한다. 이때 법통을 잇고자 하는 두 수제자가 백마를 타고 징관조사가 지적한 해뜨는 동쪽 작은 나라로 향하여 달리고 또 달려서 마침내 중국 대륙을 바라보고 서 있는 산인 지금의 송도 청량산 중턱에 당도하자마자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고, 정지해 버리고 말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리하여 홍륜사(옛날에는 인명사) 절터에 누군가가 두 마리의 백마를 상징하는 마상을 세웠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일설에는 청량산이라는 이름이 중국의 산시성에 있던 오대산(청량산)에서 전래된 것이라는 설도 있다.
연수구는 전체적으로 볼 때 계획적으로 조성된 주거 단지이므로 도로망은 비교적 규칙적인 패턴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북쪽 시내와의 연결도로가 많지 않아 출퇴근시의 교통 혼잡이 주요 당면 과제로 부각되고 있다. 문학터널은 시내와의 연결망을 높여 주고 제2경인고속도로로 연결된다. 또한 지하철 1호선이 구의 동쪽을 지나고 2009년 6월에 송도 신도시까지 연결되어서 이 지역 교통문제 해결에 도움을 주고 있다.
아울러 수인선 전철도 이 지역을 통과할 예정이다. 해안매립지 위에 건설된 해안도로는 인천항에서 남동공단으로 바로 이어 주며, 건설 중인 송도 신도시와 인천국제공항을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될 것이다.
옥련동에는 인천시립박물관과 한국전쟁기념관이 있다. 당초 시립박물관은 1946년 인천 자유공원 기슭에서 문을 열었다. 이것은 전국 최초의 시립박물관이었으며, 1990년에는 연수구 옥련동 현재의 자리에 현대식으로 말끔하게 단장을 해서 옮겨왔다. 시립박물관에는 고미술품 4천 300여 점이 소장되어 있으며, 3개의 전시실과 야외박물관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인천의 과거가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는 곳으로 박물관 현관 앞에는 바로 철제 범종 3점(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1982년 지정)이 전시되어 있다.
한국전쟁기념관은 한국전쟁 중 UN군 총사령관인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전쟁기념관이다. 이 기념관에는 휴게실, 공연장 등 다양한 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실내 외 전시장에는 남북한 군사장비와 생활모습을 비교한 사진을 비롯해 전쟁 당시 사용했던 장비를 전시하고 있다. 인천상륙작전과 관련한 멀티비전을 상영하여 어린이들에게 교육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옥련동은 본래 인천부 먼우금면 옥동, 한진리(현재 송도역 부근), 옹암리(현재 유원지 입구부근) 등이 있던 지역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먼우금, 한나루, 독바위, 송도를 병합하여 ‘옥련’이라는 지명으로 문학면에 편입시켰다가 1936년 제1차 부역확장 때 다시 인천부에 편입하여 일본식으로 송도정이라 하였는데 광복 후 옥련동으로 개칭되었다. 옥련동이란 백옥같은 돌이 많다하여 옥골 또는 옥동, 옥련동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유래를 갖고 있다. 2003년 3월 1일 옥련 1동과 2동으로 분동되었다.
선학동은 구한말 인천부 구읍면 지역으로 도재 또는 도장이라 불리었던 지역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무지물, 늑각부리를 병합하여 도장리라 하고 부천군 문학면에 편입시켰다가 1940년 4월 1일 제2차 인천부역 확장 때 다시 인천부에 편입되었다. 일제시대에는 일본식으로 무학정이라 불리다가 광복 이후 1946년 1월 1일부터 선학동으로 개칭되었다. 오늘날 선학동은 남동공업단지 배후지역 및 자연공원조성 예정지역으로, 그린벨트와 화훼단지를 포함하고 있는 도시근교 복합영농지역으로 조성되고 있다.
연수동은 구한말 먼우금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부수지, 솔안말, 새터말, 장승배기, 마리 구레매기, 머그미, 새말, 갱고지, 배꼽부리, 함박매를 병합하여 연수리라 불리던 지역이다. 1940년 4월 1일 제2차 인천 부역 확장 때 부천군으로부터 인천부에 편입되어 일본식으로 연수정이라 하였는데 광복 이후 동명 개정으로 1946년 1월 1일부터 연수동이 되었다. 연수동이란 이곳이 문학산 남쪽에 위치하여 따뜻하고 해안의 공기가 좋아 건강에 좋은 곳이란 뜻에서 생긴 동명이라고 한다.
청학동은 구한말 천부 먼우금이란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청릉, 뒷골, 물푸레골, 안골, 옥터를 병합하여 청릉과 문학산의 이름을 따서 청학리라 하였던 곳이다. 이때 부천군 문학면에 편입되었다가 1940년 4월 1일 제2차 인천부역 확장 때 다시 인천부에 편입되어 일본식으로 청학정이라 하였고, 광복 이후 1946년 1월 1일부터 청학동으로 개칭되었다.
동춘동은 이곳이 청량산 동쪽에 위치하므로 동촌 또는 동춘이라는 지명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쇠미, 풀무골, 각골, 자앞, 도굴, 동막을 병합하여 동춘리라 해서 부천군 문학면에 편입시켰다가 1940년 4월 1일 인천부역 확장 때 인천부에 편입되었고 광복 이후 동명 개정으로 1946년 1월 1일부터 동춘동이 되었다. 연수구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동춘동 역시 자연촌락과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공존하며 천혜의 자연 경관이 보존되어 있는 복합형 전원도시로 발전하고 있다.
송도동은 2006년 3월 6일자로 인천광역시 연수구 조례 제485호에 의거 법정동이 설치되었으며 송도지역이 경제자유구역 지정에 따른 국제도시개발이 가속화됨에 따라 2007년 1월 1일 지방자치법 제4조에 의거 동춘2동에서 송도동으로 분동되었다. 송도동은 전국적으로 유명한 송도유원지 앞을 매립하여 조성한 송도국제도시 전체를 포함하고 있다. 송도국제도시의 개발과 함께 면적과 인구가 계속 늘어나고 있는 추세에 있으며 국내외로 관심이 집중되는 지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