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장군사당제 ()

남이장군제
남이장군제
민간신앙
의례·행사
문화재
매년 10월 남이장군사당에서 조선시대의 무장으로 억울하게 희생된 남이장군신을 모시고 마을의 안녕과 길복을 기원하는 사당제. 제의.
정의
매년 10월 남이장군사당에서 조선시대의 무장으로 억울하게 희생된 남이장군신을 모시고 마을의 안녕과 길복을 기원하는 사당제. 제의.
개설

서울특별시 용산구 용문동 남이장군사당에서 행해지는 당제로, 1999년 7월 1일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예능보유자 이명옥이 의례를 주관한다.

연원 및 변천

조선 전기에 젊은 나이로 요절한 남이(1441∼1468) 장군의 원혼을 달래 주고 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제의가 오늘날 마을 축제로 정착하게 되었다. 남이장군당이 생기게 된 내력은, 500여 년 전 남이장군이 이곳 용문동에서 병사들을 육성했는데 그 부하가 후세에 그를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했다는 설이 있다. 일설에는 그가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한강변 새남터에서 처형되었다가 1818년(순조 18)에 충무공 시호를 받았을 때 함께 국봉서원에 향배하였으므로 그를 길이 추모하기 위하여 이곳에 모셨다고도 한다.

원래 당은 원효로 2가 당고개라는 거제산에 있었는데, 장군이 현몽(現夢)해서 1904년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당 내부에는 중앙의 남이장군무신도를 비롯하여 부군대감 내외, 최영장군, 정추정씨와 부인상, 산신령 내외, 토지관장, 천신대감, 맹인 내외 등의 무신도가 걸려 있다.

행사내용

제의는 크게 소제(小祭)와 대제(大祭)로 나뉘는데, 4월 소제 때는 유교식 제의로 간략히 지내고, 10월 대제 때는 당굿이 행해진다. 제의의 진행과정은 먼저 당제 10일 내지 15일 전에 제관으로 제주 1인과 집사(執事) 1인을 선정한다. 제관은 부정이 없는 깨끗한 사람으로 생기복덕을 보아 뽑는다. 제물 준비는 당제 3일 전 제주가 제주(祭酒)인 ‘조라’를 담근다. 제물은 일반 제사 때와 거의 비슷한데, 쌀 3되 3홉으로 팥시루떡을 쪄서 통시루로 바치고, 당굿에는 돼지 1마리를 바친다.

제비(祭費) 충당을 위한 걸립은 제의 3일 전부터 한다. 남이장군사당제가 시작되면 걸립패들이 농악을 울리며 집집마다 방문하여 당제와 굿에 쓸 경비를 마련하는데, 이때 무녀가 동참하여 돌돌이[遊街]를 한다. 특히 남이장군의 가장행렬과 느름대인 용을 그린 당기와 백지를 달아맨 걸립기를 앞세우고 용문시장 일대를 도는 ‘걸립돌기’가 장관이다. 걸립이 끝나면 ‘꽃받기’라 하여 산천동 부군당에서 꽃을 본당으로 모셔오는 꽃받기가 있었으나, 현재는 꽃등행렬 행사로 변모되어 산천동 당집에서 사당까지 행진하고 사당에서 제를 올린다.

사당제는 분향(焚香), 헌주(獻酒), 독축(讀祝), 소지(燒紙), 음복(飮福) 순으로 유교식으로 진행된다. 사당제가 끝난 뒤 날이 밝으면 당굿이 행해진다. 당굿의 진행은 가망청배, 부정치기, 호구거리, 말명거리, 조상거리, 상산거리, 별상거리, 대감거리, 창부거리, 제석, 거리, 군웅거리, 황제풀이, 뒷전의 순서로 진행된다.

굿이 끝나면 다음날(전에는 3일 뒤) 제주와 화주, 그리고 마을 어른들이 당에 모여 잡인이 경내에 들어왔음을 사죄하고 무사히 지내게 되어 감사하다는 뜻을 고하는 사례제(謝禮祭)를 거행한다. 사례제가 끝나면 제물을 내려 대동잔치를 열고, 대제가 끝난 뒤 제관과 임원은 경기도 화성시에 있는 남이장군묘에 가서 간단히 제를 올리고 온다.

현황

1972년 일시 대제행사가 중단되고 제사만 모시다가 1983년 11년 만에 대제행사를 복원하여 제1회 행사를 거행한 뒤 남이장군사당제보존회 주관으로 매년 지내고 있다. 전에는 매년 음력 4월 1일과 10월 1일에 당제를 지내고, 3년마다 4월 1일에 대규모의 당제를 지내고 굿을 하였으나, 지금은 음력 10월에 대제와 당굿을 한다.

의의와 평가

남이장군사당제는 용산구의 지역축제로서뿐만 아니라 서울특별시의 대표적인 지역축제의 하나로서 거행되며 역사적·문화적 의의가 크다.

참고문헌

『서울정도육백년』(이경재, 서울신문사, 1993)
『서울의 동제당과 축제』(이재곤, 한국향토사연구전국협의회, 1990)
『용산구지』(용산구, 1980)
「남이장군대제론」(김선풍, 『비교민속학』13, 비교민속학회, 1996)
관련 미디어 (1)
집필자
김선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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