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여산(礪山). 아명은 송금섬(宋金蟾)이고, 호는 남해(南海)이며, 창씨개명한 이름은 후쿠자와 레이코[福澤玲子]다. 아버지는 대한제국 육군 참령 출신인 송우영(宋禹榮)이고, 어머니는 김명운이다. 남편은 박준섭(朴俊燮)이다.
1905년 1월 15일 서울 종로에서 태어났다. 1916년 4월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였다. 1919년 졸업한 후 일본 유학을 떠나 1921년 니가타현[新瀉縣] 가시와자끼[栢崎]고등여학교를 졸업하고 1925년 도쿄[東京] 여자고등사범학교 가사과를 졸업하였다. 귀국 직후 1925년 모교인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로 교단에 섰다. 일본에 있을 때 만난 메이지대학 정경학부 출신 박준섭과 결혼하려 하였으나 부모가 반대하자 1926년 진주로 내려갔다. 진주에 있는 일신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봉건 관습에 도전하고 생활합리화를 실행한다면서 단발을 하고 반소매 원피스를 입어 지역사회에 파문을 일으켰다.
마침내 부모를 설득하여 1929년 10월 박준섭과 결혼하였다. 결혼 후 1930년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4년간 교사로 봉직하다가 1934년에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가 되었다. 이후 여성계 지도자로 부상하여 각종 관변단체 요직을 맡아 부인을 대상으로 일제의 식민정책 홍보에 앞장섰다. 1936년 12월 조선총독부 학무국이 주최한 ‘반도부인의 생활개선좌담회’에 참석하였고, 1937년 1월 14일부터 조선총독부 사회교육과가 주관하는 방송선전협의회 강사로 황국신민화를 위한 부인교육 강좌를 진행하였다. 1월 29일에는 조선총독부 학무국이 조직한 조선부인문제연구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일제가 중일전쟁을 일으킨 직후 1937년 8월 전쟁비용에 보태라고 금비녀 등을 헌납하자는 애국금차회(愛國金釵會) 발기인으로 참여해서 간사를 맡았다. 1938년 11월 경기도 사회과가 생활개선확립을 위해 부인부대 10명을 선정할 때 뽑혀 부천에서 강연하였다. 1939년 조선총독과 정무총감 부인을 비롯한 총독부 고위관료 부인과 여류명사가 조직한 청담회(淸潭會) 회원으로 참여하였다. 8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 각도에 순회강연반을 파견할 때 강사로 참여하였다.
1940년 8월 차미리사에게 재정난에 허덕이던 덕성여자실업학교를 인수한 후 남편의 도움을 받아 건물을 새로 짓는 등 확충하였다. 덕성여자실업학교는 1923년 차미리사가 설립한 부인야학강습소인 근화학원으로 출발하여 1934년 근화여자실업학교로 개칭한 학교였다. 1941년 1월 『삼천리』에 「여자도 훈련 필요」와 『신시대』에 「시대도 새로운 이날, 여인으로 알아둘 예절」을 기고하고, 9월에는 『조광』사가 주최하는 ‘전시국민생활 강조 좌담회’에 참석하여 여성의 전쟁협력을 독려하였다. 같은 해 9월 전쟁협력단체인 임전대책협력회의 채권가두 유격대로 참여하였고, 10월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 부인대 지도위원에 임명되었다. 1942년 2월 재단법인 덕성학원 이사에 취임하였고, 같은 달 조선부인문제연구회가 부민관에서 연 시국강연회에서 「싱가포르 함락과 황국부인의 각오」로 강연하였다.
1943년 6월 일제가 전시체제를 강화하기 위한 국민총력조선연맹의 경성부연맹 이사에 선임되었고, 7월 대일본부인회 조선본부 경성지부 팔판정 분회장으로 임명되었고, 8월 용산에서 애국반 부인을 대상으로 한 강연회 강사로 참석하였다. 같은 해 9월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연성부 연성위원회 위원을 겸하였고, 11월 임시지원병제도익찬위원회가 종로지역 지원병제도 홍보와 권유를 위해 주최한 가정방문 행사에서 실행위원을 맡아 제1반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같은 달인 11월 조선교화단체연합회가 지원병 독려를 위해 전국 각지에 파견한 전위여성격려대 강사로 충청남도 천안·대전·공주 등지에서 「일본 여성의 갈 길」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하였다. 1944년 3월 종로총궐기위원회 특별위원을 맡아 시국강연회에서 「군국 어머니: 반도여성 책무도 크다」라는 연제로 강연하였고, 11월 조선교화단체연합회가 조직한 부인강연반에 소속되어 경기도 의정부·연천·용인 등지에서 「전국(戰局)인식과 징용징병제의 철저」라는 제목으로 강연하였다. 그러나 정작 자신의 장남 박원국이 특공대에 뽑혀가지 않도록 병원 진단서를 제출하였으며, 막내동생 송성순을 다락방에 숨겼다.
각종 신문·잡지에 일제침략전쟁을 미화하고 조선인의 전쟁협력과 총후활동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으며, 여성을 대상으로 지원병 및 징병참여를 독려하는 글을 기고하였다. 주요 글을 보면 「여자도 훈련 필요」( 『삼천리』, 1941.1), 「빛나는 통치 31년」(『매일신보』, 1941.10.1), 「단체적 국가관념 주입에 전력」(『삼천리』, 1942.1), 「군국 어머니: 반도여성 책무도 크다」(『매일신보』, 1942.5.10) , 「징병과 어머니의 길」(『춘추』, 1944.1), 「물리칠 봄의 향락: 마음바로잡고 결정장에」(『매일신보』, 1944.4.11), 「구호와 간호쯤은 부인 상식으로 알아둘 것」(『매일신보』, 1944.5.10) , 「가장 기꺼운 소식: 우리 학병은 잘 싸운다」(『매일신보』, 1944.6.4) , 「입영 전의 몸가짐: 어머니는 엄숙한 훈계를」(『매일신보』, 1944.8.18) 등이다.
해방 후 1945년 10월 덕성고등여학교 교장에 취임하였고 1947년 5월 조선민족청년단 서울지부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50년 5월 문을 연 덕성여자초급대학 초대학장으로 취임하였다. 1952년 4월 4년제 대학으로 승격되자 덕성여자대학교 학장과 덕성여자중고등학교 교장을 겸하였다. 1960년 4·19 혁명이 일어나자 6월 교장직에서 물러났다가 그해 12월에 복귀하였다. 1961년 4월 덕성여자대학교 대학원장에 취임하였고 대한적십자사 부녀자문위원으로 위촉되었다. 1966년 5·16민족상 이사에 선입되었고 1968년 하와이에서 열린 범태평양동남아여성대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였으며 그해 미국 저드슨(Judson)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1958년 이래 덕성학원 이사장을 맡았던 남편 박준섭이 1970년 사망하자 이사장으로 재임하다가 1977년 장남인 박원국이 계승하였다. 1970년 3월 한국여성단체협의회 부회장으로 선출되었으며 1971년 네널란드 암스테르담에서 개최한 세계여성단체협의회 한국 대표로 참석하였다. 1972년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1974년 훌륭한 어머니상과 대한민국 국민훈장 동백상을 받았다. 1987년 2월 24일 노환으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