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장지동유적은 2000년 12월 20에서 2001년 4월 30일까지 성남∼장호원 도로개설공사(2공구) 구간에 대한 지표조사에서 처음 존재가 보고되었으며, 장지동유적지에 대해서는 2006년 5월 1일부터 2007년 12월 10일까지 시굴조사 및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이 유적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 청동기시대 유적으로는 집터[住居址] 8기와 구덩유구[竪穴遺構] 4기가 조사되었고, 백제시대 초기 유적으로는 집터 16기, 구덩유구 20기, 도랑유구[溝狀遺構] 1기 등이 발굴되었다. 이와 더불어 조선시대 유적으로는 구덩유구 4기와 도랑유구 1기가 발굴되었다. 이외에도 시대를 알 수 없는 구덩유구 15기가 발굴되었다. 발굴조사의 종합적인 성과물로서 2010년 8월 29일에 발굴조사보고서 『광주 장지동 취락유적』이 간행되었다.
장지동유적에서는 청동기시대의 집터와 구덩유구, 백제시대 초기의 집터와 도랑유구, 그리고 조선시대의 구덩유구와 도랑유구 등 모두 69기의 유구가 발굴되었다.
청동기시대 집터는 모두 8기이다. 제1호는 세장방형으로 장축 약 1.52㎝, 단축 약 240㎝, 깊이 28㎝이다. 내부에 벽도랑[壁溝]과 기둥구멍[柱穴] 등이 있으며, 화덕자리는 확인되지 않았다. 집터 내에서 돌끌, 숫돌, 가락바퀴, 민무늬토기조각 등이 출토되었다. 제2호는 모줄임 네모모양이며, 잔존 길이 430㎝, 잔존 너비 376㎝, 깊이 14㎝이다. 내부에서 반파된 팽이모양토기 2점이 출토되었다. 제3호는 모줄임 네모모양으로 추정되며, 잔존 길이 298㎝, 잔존 너비 161㎝, 깊이 20㎝이다. 내부에서 민무늬토기조각과 간돌도끼[磨製石斧] 1점이 출토되었다. 제4호는 원형이며, 규모는 430×420㎝이고, 내부에서 구덩과 2개의 기둥구멍이 확인되었으며, 민무늬토기조각과 갈돌이 출토되었다. 제5호는 모줄임 네모모양으로 추정되며, 내부에 기둥구멍 1개가 노출되었고, 민무늬토기조각과 붉은간토기[紅陶] 조각이 출토되었다. 제6호는 모줄임 네모모양으로 추정되며, 내부에 구덩이모양의 화덕자리가 확인되었고, 골아가리무늬토기[口脣刻目文土器]·바리모양토기[鉢形土器]가 수습되었다. 제7호는 결실이 심하여 정확한 형태는 알 수 없으며, 민무늬토기조각 등이 소량 출토되었다. 제8호의 평면형태는 파악할 수 없으나, 내부에서 깐돌식[敷石式] 화덕자리시설이 조사되었고, 민무늬토기조각이 소량 출토되었다.
이들 집터 가운데 원형의 제4호는 내부에 구덩과 2개의 기둥구멍이 배치되어 있어 송국리형 집터 형식으로 판단되고 있으며, 모줄임 네모모양의 제2호 집터에서는 겹아가리에 짧은빗금[短斜線]이 시문되지 않은 팽이모양토기가 출토된 점이 특징이다.
청동기시대 집터의 연대는 2530±20BP(제3호), 2510±20BP(제4호), 2545±20BP(제8호)로 측정되어 대체로 청동기시대 중기로 편년되고 있다. 그러나 제2호 집터는 팽이모양토기가 출토된 연천 삼거리유적의 제9호 집터에 대한 방사성탄소연대가 서기전 1130년으로 측정되고 있어 다른 집터들보다 앞설 것으로 판단된다.
백제시대 초기의 집터는 모두 16기이며, 평면형태는 크게 철(凸)자형(제12·13·14·16·17·18호), 육각형(제19·20호), 그리고 긴네모모양(제10·11·22호)으로 나누어진다. 이 가운데 육각형은 출입구와 집터 사이에 통로가 설치된 여(呂)자형 출입구가 있고, 철(凸)자형의 출입구는 단순한 통로형태이다. 집터는 단벽 형태에 따라 출입구 반대쪽 벽면이 직선으로 처리된 집터(제12·13·15·18호)와 둔각을 이룬 집터(제14·16·17·20호)로 세분된다. 출입구의 형태는 직선 벽면에서 출입구 부분만 약간 둥글게 처리된 집터(제10호), 철자형이며 출입구의 폭이 좁고 길이가 짧은 집터(제12·13·18호), 일반적인 철자형 집터(제14·15·16호), 여(呂)자형 집터(제19·20호), 네모모양으로 출입구가 확인되지 않은 집터(제11·22호)가 있다. 출입구 방향은 대체로 동쪽이나 남쪽 혹은 남동쪽이며, 출입구는 외부에서 내부 공간으로 경사지면서 단단하게 조성되었다.
집터의 벽체 조성은 벽도랑과 기둥구멍을 먼저 굴광한 뒤 원형의 기둥을 모서리 부분이나 벽에 세우고, 그 사이에 판재를 채워 마감하였는데, 이들 판재의 너비는 10∼25㎝ 내외이며, 두께는 약 5㎝이다. 화덕자리시설은 부뚜막, 깐돌식 화덕자리, 무시설식 화덕자리 등 3가지 형태로 조사되었다. 부뚜막시설은 모두 6기(제10·11·14·16·20·22호)에서 확인되었다. 대부분 출입구 반대쪽 벽의 우측에 조성되어 있고, 평면형태는 아궁이부는 넓고 굴뚝 쪽으로 갈수록 좁아지는 사다리꼴[梯形]이며, 깬돌으로 두 벽을 만든 뒤 점토로 보강한 것(제11·16·22호)과 점토로만 조성한 것(제10·14·20호)이 있다. 깐돌식 화덕자리는 제18호와 제22호 집터에서 조사되었으며, 이들 화덕자리는 모두 넓적한 강자갈을 깔아서 만들었다. 제18호 집터의 깐돌식 화덕자리에는 톱니무늬가 시문된 토기가 깔려 있으며, 제22호 집터의 화덕자리는 한 차례 폐기과정을 거친 뒤, 그 위에 강자갈을 깔고 재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화덕자리는 대체로 출입구 반대쪽 약 3/5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제22호 집터의 경우는 깐돌식 화덕자리와 부뚜막이 동시에 채용되고 있으며, 두 개의 시설이 각자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무시설식 화덕자리는 제12·13·15호 집터에서 확인되었다.
백제초기 집터는 4단계로 편년되는데,Ⅰ단계(서기 1세기 중기∼2세기 중기)는 전면의 단벽은 둔각이며, 후면 단벽은 직석으로 처리되어 전체적인 평면형태는 오각형이고, Ⅱ단계(2세기 중기∼3세기 중기)는 출입구쪽 단벽이 더욱 벌어지고 있으나 후면 단벽은 직선을 유지한 오각형이며, Ⅲ단계(3세기 후기∼4세기 초기)는 전면과 후면 단벽이 모두 둔각을 이룬 육각형이다. 마지막으로 Ⅳ단계(4세기 초기∼5세기 초기)는 평면형태가 긴네모모양과 육각형으로 나뉘는데, 육각형은 여자형 출입구가 있다.
광주 장지동유적의 청동기시대 집터는 평면형태나 출토된 유물의 양상을 통해서 두 개의 서로 다른 문화가 한 지점에서 시기 차를 두고 나타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즉, 제4호 집터는 내부에 구덩과 2개의 기둥구멍이 배치되어 있어 남부지방의 전형적 집터 형식인 송국리형 집터이며, 제2호 집터는 모줄임 네모모양이며, 한반도 북서부지방에서 주로 나타나는 팽이모양토기가 출토되었다. 따라서 장지동 청동기시대 집터는 평면형태나 출토유물 등을 고려할 때, 한반도 북부와 남부지방의 문화가 모두 나타나는 보기 드문 유적으로서 가치가 있다.
백제시대 초기 집터는 철(凸)자형 집터와 여(呂)자형 집터가 발굴되었는데, 이러한 집터들은 백제 초기의 왕도(王都)로 판단되는 풍납토성(風納土城)을 비롯하여 백제 한성시기 주요 거점지역에서 나타나는 집터 형태이다. 따라서 장지동에서 발굴된 백제 초기의 집터들은 백제 한성시기 왕도 동남부 지역의 집터 양상을 알려주는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