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금관 ( )

천마총 금관
천마총 금관
고대사
개념
삼국시대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에서 출토된 금제 관.
정의
삼국시대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에서 출토된 금제 관.
개설

신라고분에서는 공식적으로 5점의 금관이 출토되었고, 국가에서 압수한 도굴된 금관 1점을 합하면 모두 6점의 금관이 현존한다. 금판을 오리고 붙여 만든 것이며, 아래쪽에 둥근 관테[臺輪]가 있고 그 위로 5개의 세움장식[立飾]을 부착한 것이다. 세움장식은 나뭇가지모양과 사슴뿔모양이다. 금관의 표면에는 비취(翡翠) 곱은옥[曲玉]과 금판을 둥글게 오려 만든 달개[瓔珞]가 많이 달려 있다.

연원 및 변천

신라금관의 연원에 대해서는 시베리아 유목 민족이 신라로 이주하면서 전해졌다고 보는 견해와 신라인들이 자체적으로 만들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전자는 신라 금관의 나뭇가지모양과 사슴뿔모양 장식이 시베리아 샤먼(shaman)이 착용했던 관과 유사하다는 점에 근거하고 있다. 그렇지만 시베리아 샤먼이 썼던 관과 신라 금관 사이의 시간·공간적 틈이 너무나 큰 것이 문제이다. 그 때문에 신라인들이 북방의 황금문화를 수용하여 그들이 전통적으로 선호해온 도안에 접목, 금관을 창작하였던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5점의 신라 금관은 5∼6세기에 제작된 것이며 약 100년의 시간 폭을 지닌다. 금관 출토 고분의 연대, 금관의 도안과 제작기법에 주목해보면, 황남대총 북분 금관 → 금관총 금관 → 서봉총 금관 → 천마총 금관 → 금령총 금관 순으로 금관 제작 순서를 추정할 수 있다.

내용

신라의 금관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즉, 관테 위에 나뭇가지모양 장식 3개, 사슴뿔모양 장식 2개 등 모두 5개의 장식을 덧붙인 점을 들 수 있다. 또한 둥글게 말은 관테의 끝(후면에 위치)에 각각 둥근 구멍이 뚫려 있으며 못이나 금속선으로 고정되어 있지 않다. 금동관 가운데는 금속선이나 못으로 고정한 예가 많아 금관과는 양상이 다소 다르다.

이와는 달리 금관들 사이에 차이점 또한 존재한다. 첫째, 나뭇가지모양 장식의 형태가 조금씩 다르다는 점이다. 황남대총 북분, 금관총, 서봉총 금관 산(山)자형 장식이 3단이지만 금령총이나 천마총 금관은 4단이다. 이러한 차이는 금관 제작의 시기차를 반영해주는 것으로 여겨진다. 뿐만 아니라 달개나 곱은옥의 수량과 금판에 베풀어진 무늬도 다른데 이 또한 금관이 유행하던 시기마다 세부적인 양식차가 존재함을 보여주는 것이며 그 변화는 간단한 것에서 복잡·화려해지는 방향이다. 둘째, 5점의 금관 가운데 유독 금령총 금관에만 곱은옥이 달려 있지 않으며 사슴뿔모양 장식 역시 1매의 금속판으로 만들지 않고 세부 장식을 별도로 만들어 붙였다는 점이 특이하다.

신라금관은 왕릉뿐만 아니라 왕비, 왕자와 왕족 여성의 무덤에서도 발굴되었다. 그 때문에 금관이 곧 왕관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근래에는 신라 금관의 제작기법이 매우 거친 점, 부장방식이 특이한 점 등을 들어 장송의례용 부장품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신라 금관에는 몇 가지 상징성 강한 도안이 표현되어 있다. 즉, 세움장식의 형태가 나뭇가지와 사슴뿔모양을 띠고 있으며 관에는 곱은옥이 가득 매달려 있다. 금관에 표현된 나뭇가지는 하늘로 통하는 통로이자 생명수, 사슴뿔은 하늘의 정령을 받아들이는 장치였던 것으로 추정하는 연구자가 많다. 곱은옥에 대해서는 원초적 생명체로 보며 저승에서 부활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장식하였다고 한다.

신라 금관의 이러한 장식은 금관의 출토양상과도 관련된다. 금관은 거대한 무덤 속에 한정적으로 부장되며 최고의 공예품과 함께 묻혀 있다. 현세의 지위나 경제력이 우월한 신라의 왕족과 그 측근들은 인생의 한정성을 깨닫게 되면서 사후세계에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자신의 삶이 영원하기를 희구하였다. 그들은 현세의 삶이 내세로 그대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경우가 많아서 금관을 비롯한 수많은 물품을 무덤 속에 부장했는데, 심지어는 시중들던 사람까지도 함께 묻었다.

신라금관이 제작되었던 시대에는 금관뿐만 아니라 금귀걸이, 금목걸이, 금반지, 금동신발, 장식대도 등 화려한 금속공예품 또한 유행하였다. 그런데 절정기에 오른 신라의 황금문화는 더 이상 꽃피지 못하였다. 6세기 신라사회는 마치 큰 소용돌이와도 같은 급격한 사회변화를 겪었다. 그러면서 신라인들의 죽음에 대한 생각이 바뀌게 되었던 것 같다. 국가에서도 사회분위기를 일신하고자 했으며 그 과정에서 돌무지덧널무덤과 같은 큰 무덤과 각종 황금장식이 차츰 사라지게 된다. 금관 역시 그러한 변화의 와중에서 사라졌다. 그 대신 황금으로 만든 각종 장식은 사찰의 불상이나 사리공양품 등 불교공예품으로 거듭나게 된다.

현황

현재까지 발굴된 금관은 황남대총 북분, 금관총, 서봉총, 금령총, 천마총 출토품 등 5점이다. 대부분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경주박물관에 분산 소장되어 있다. 한편 도굴 후 국가에서 압수한 금관 1점이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경주시 교동의 폐고분에서 도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의의와 평가

신라 금관은 예술적으로 가치가 높을 뿐만 아니라 매우 상징성이 강한 유물이다. 경주 시내에 대규모의 돌무지덧널무덤을 축조하던 신라인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믿음과 소망을 금관의 도안에 담아냈던 것이다. 결국 금관을 통해 우리는 신라인들이 지녔던 내세에 대한 인식을 일부나마 살펴볼 수 있게 되었다.

참고문헌

『황금의 나라 신라』(이한상, 김영사, 2004)
「고대관의 분류체계에 대한 고찰」(함순섭,『고대연구』8, 2001)
「수지형입화식관 형식분류 시론」(박보현,『역사교육논집』9, 1986)
금관총 금관(국립경주박물관,『신라황금』, 2001)
서봉총 금관(국립경주박물관,『신라황금』, 2001)
천마총 금관(국립경주박물관,『신라황금』, 2001)
집필자
이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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