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조선 17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구연부와 몸체 하단에 종속문이 시문되어 있고 몸체 전면에는 앞뒤로 매화와 대나무를 그려 넣었다. 유조는 17세기 특유의 옅은 회백색을 보이며 철화안료로 속도감 있게 시문된 회화적인 문양이 전면의 은은한 광택과 어우러져 한 폭의 문인화와 같다.
커다란 백자 항아리의 몸체 앞뒤로 철화안료를 이용한 매화와 대나무를 그려 넣은 항아리이다. 조선시대 17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항아리의 형태는 몸체 상단이 풍만하고 허리가 잘록하게 처리된 역삼각형의 형태를 보인다. 굽은 밖으로 살짝 벌어지며 구연은 직립하지 않고 안쪽으로 기울어 있다.
조선시대 철화백자는 주로 17세기를 중심으로 제작되었는데, 이 시기 제작된 백자들은 원료 정제에 문제가 많아 표면이 회백색을 띠고 있다. 17세기는 조선에 있어 전란이 끊이지 않고 혼란스러웠던 시기인데, 당시 철화백자가 주로 제작되었던 것 역시 이러한 시대적 배경과 연관을 가진다. 임진왜란 직후 조선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으며 자연히 그릇의 제작 역시도 전과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또 명과 후금사이의 긴장관계로 청화안료의 수입 역시 거의 불가능해지자 신하들은 일부 깨진 청화용준을 바치거나 가화(假畵)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철화백자의 생산 가마로는 1630년대 상림리 가마부터 송정리, 유사리, 신대리 등지로 17세기 가마 대부분에서 발견되었다. 문양은 간단한 초화문이나 당초문, 운룡문, 매화와 대나무, 국화, 기하하적 문양 등이 자주 보인다.
이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의 백자화매죽문호는 문인을 상징하는 매화와 대나무가 앞뒤로 표현되어 있고 구연부와 저부에는 간단한 종속문이 시문되어 있다. 먼저 매화는 잎은 윤곽선만 처리하여 형식적으로 처리하였고 가지는 굵게 채색하였다. 하단에서 오른쪽 위, 왼쪽 위로 각각 뻗어나가는 두 대의 매화가지는 X자로 표현되어 있으며 그 외의 화면은 모두 여백으로 남겨두었다. 후면의 대나무는 하나의 대에서 뻗어 나가고 있으며 잎은 세 갈래로 표현되었다. 역시 매화와 같이 거칠게 마무리하였으며 이를 통해 사실적인 매죽의 표현보다는 상징성 표현에 무게를 두었음을 알 수 있다. 가지의 처리에서는 대담한 필치로 능숙함이 엿보이며 속도감과 생동감이 전해진다. 화풍 상으로는 17세기 후반의 허목(許穆, 1595∼1682), 김세록(金世祿, 1601∼1689), 이정(李霆, 1554∼1626) 등과의 유사성이 고려된다. 종속문에는 도식화된 삼각형 연잎을 그리고, 어깨에는 변형된 여의두문대를 배치하여 넓은 문양대를 구획하였다.
기형상으로는 이전 시기의 항아리에 비해 크기가 커지고 굽은 오목굽으로 바뀌었으며 몸체 곡선은 커다란 타원을 그리면서 중심부로 향하고 있다.
이 작품은 다루기 어려운 철화안료를 이용하여 정교하면서 수려한 필치로 문인을 상징하는 매죽문을 표현한 수작이다. 또 역사적으로는 양난 이후 혼란스러운 국정과 곤궁한 분원 경영의 상황 아래에서 청화안료의 수급이 어려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변화를 타개하고자 극복의 의지를 보여준 17세기 조선의 모습을 대변하기도 하여 미술사적·역사적으로 중요한 의의를 내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