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 출신과 가계 등은 기록에 전하지 않아 자세히 알 수 없다. 1230년(고종 17) 8월 최우(崔瑀)의 동생 최향(崔珦)이 충청도 홍주(洪州)로 귀양간 이후 지역 내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지병마사(知兵馬事)로서 병마사(兵馬使) 채송년(蔡松年)을 보필하며 군대를 이끌고 가서 난을 평정하였다. 중앙 정부군을 통솔하고 홍주 지역민을 잘 규합하여 최향 일파를 제거하는데 성공하였다.
그 해 9월 고종이 묘통사(妙通寺)에 도착할 때 말이 놀라, 국왕이 땅에 떨어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당시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였던 왕유가 호위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견룡행수(牽龍行首)를 감옥에 가두려 했지만, 어사대부(御史大夫) 차척(車倜)이 견룡 두 사람만을 탄핵해서 파면시켰다. 또한 같은 해 11월 왕유는 팔관회(八關會)가 규례에 어긋났다는 것 때문에 일을 담당하는 하급 관리를 꾸짖었다. 차척은 왕유가 재상을 질책하였다고 오해하여 고종에게 그대로 보고하였다. 이때 왕유는 상서좌승(尙書左丞) 송순(宋恂), 판위위시사(判衛尉寺事) 이규보(李奎報) 등과 같이 섬에 유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