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1995년 조선대학교 박물관의 지표조사로 확인되었으며, 1998년 제1차 발굴에서 약 7만㎡에 이르는 대규모 구석기유적으로 밝혀졌다. 2001년 제2차 발굴과 2005년 제3차 발굴에서는 5개의 문화층이 확인되었다. 세 차례의 발굴에서 전체 면적의 약 2%에 해당하는 1,445㎡가 조사되었으며, 모두 13,900여 점의 석기가 발견되었다.
유적은 고동산(709.4m)의 끝자락인 낮은 언덕(190∼220m)에 위치하는데, 세 면을 냇물이 감싸 흘러 마치 해자로 둘러싸인 성 같고, 겨울에는 햇빛이 늦게까지 비춰 따뜻하고 아늑하다. 유적 앞 물가에는 양질의 석영맥암을 포함하여 여러 가지의 자갈돌들이 분포한다.
5개의 문화층은 제2하성단구면 위에 있는 약 2m 두께의 비탈쌓임층에서 발견되었다. 이 가운데 중간문화층이 속한 암갈색 찰흙질모래층에는 약한 토양쐐기(Soil-Wedge) 현상이 관찰되는데, 이것은 마지막 빙하 극성기에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맨 위의 두 문화층은 모두 좀돌날몸돌을 포함하고 있어 후기구석기시대 후반에 속함을 알 수 있다. 중간문화층은 토양쐐기 현상보다 아래에 있고, 출토된 밀개, 긁개, 부리날 같은 잔손질석기는 위의 두 문화층에서 나온 것과 상당히 유사하여 후기구석기시대 중반에 속할 것으로 생각된다. 아래의 두 문화층은 아직 제대로 조사되지 못하였지만, 중간문화층에 인접한 퇴적층에 속한다는 점에서 후기구석기시대 전반에 속할 것으로 보인다.
발굴 조사된 3개의 문화층에서는 석기 제작터가 확인되었다. 특히 맨 위 문화층에서는 밀개 집중 지점, 규산이 많이 포함된 유문암으로 좀돌날몸돌을 만든 지점, 수정으로 좀돌날을 제작한 지점 등이 발견되었다. 석기의 구성은 슴베찌르개, 나뭇잎모양찌르개 같은 사냥도구류, 밀개, 긁개, 뚜르개, 새기개 같은 가공도구류, 그리고 소형 주먹도끼, 찍개 같은 몸돌석기 등이며, 이밖에 무엇인가를 갈았던 중·대형의 편평한 자갈돌과 손바닥만한 크기의 등잔 모양 석기도 있다.
석기의 재질은 양질의 석영맥암이 94.5%로 대다수이고, 나머지는 산성화산암, 수정, 흑요석 등이다. 석영맥암은 유적 주위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으나, 산성화산암이나 흑요석은 먼 곳에서 가져온 듯하다. 석영맥암으로는 밀개, 긁개, 뚜르개, 홈날, 톱니날 등을, 산성화산암으로는 좀돌날, 돌날, 슴베찌르개, 새기개, 밀개 등을, 그리고 수정으로는 좀돌날, 밀개, 뚜르개를 제작하였다.
유적은 식물성 식량과 사냥감이 풍부한 산으로 접어드는 길목이면서, 맑은 물과 양질의 돌을 쉽게 구할 수 있고 맹수나 침입자를 경계하기 좋은 곳에 자리하였다. 석기 제작을 포함하여 뼈나 뿔 제품의 제작, 가죽의 처리, 식량의 가공, 먹고 잠자기 등 구석기인들의 일상 행위 흔적이 곳곳에 잘 남아있는데, 지표에서 발견된 흑요석 조각은 원산지 분석 결과 일본 규슈〔九州〕산으로 추정된다. 이 유적은 후기구석기인들이 수 만년 동안 반복해서 찾아와 살았던 보금자리(base camp)의 성격을 지닌 대규모 유적이다.
유적은 우리나라 후기구석기시대의 편년과 석기의 형식, 유적 형성 과정을 밝힐 수 있는 학술 자료의 보고이다. 또한 후기구석기인들의 동북아시아 원거리 교류를 규명하는데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