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신지는 선주(宣州: 평안북도 선천군). 선주의 향공진사(鄕貢進士) 출신이다. 형은 산원(散員)에 오른 방효진(房孝珍)과 선주의 호장(戶長) 방득령(房得齡)이다.
1170년(명종 즉위년) 무신정권에 저항하여 일어난 반무신란(反武臣亂)의 대표적인 사례인 조위총(趙位寵)의 난이 발발하였다. 이때 북계 지방에 있는 여러 성들이 조위총에 협조하였으며, 방서란의 출신지인 선주도 조위총의 편에 가담하였다. 당시 방서란의 장인인 병마판관(兵馬判官) 윤중첨(尹仲瞻)은 무신정권에서 파견한 진압군의 지휘관이자 윤중첨의 사촌형인 윤인첨(尹鱗瞻)의 휘하에 있었다. 따라서 진압군이 선주로 다가오자 방서란은 장인과 맞서 싸워야 하는 입장에 처해 있었다.
방서란은 형인 방효진, 방득령에게 그러한 곤란한 입장을 설명하면서 조위총세력이 자멸할 것이라고 설득하여, 형들의 동의를 얻어냈다. 방서란의 견해에 동의한 방효진 등이 진압군에 귀순하도록 선주 사람들을 설득하였고, 마침내 선주를 비롯한 서북 지방의 여러 성들이 조위총의 세력에서 이탈하였다.
선주인들이 조위총세력에서 이탈하려고 할 때, 조위총이 장군으로 임명한 선주의 도령낭장(都領郎將) 의유(義儒)가 홀로 반대하였다. 방효진이 의유를 활로 쏘아 죽인 후, 의주(義州: 평안북도 의주군)에 사람을 보내 이 사실을 알렸다. 의주인들도 조위총이 장군으로 임명한 경작(景綽)을 죽이고 이에 호응하였다. 선주와 의주의 소식을 들은 다른 성들도 모두 무장을 해제하여 무신정권의 진압군에 투항하였다. 1176년(명종 6)에 있었던 방서란과 그 형들의 이같은 활동은 조위총의 난이 진압되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다.
조위총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방서란은 개경 조정으로부터 동정직(同正職) 내시(內侍)가 되었다. 형 방효진은 산원(散員) 벼슬을 받았으며, 방득령은 향리(鄕吏)의 우두머리인 호장(戶長)에 임명되었다. 이후 선주인들이 방효진이 홀로 무반 벼슬을 받은 것을 시기하여 호장 방득령과 방득령의 모친을 살해하였다. 이러한 점을 볼 때, 조위총의 난이 진압되는 과정에서 선주 사람들 사이의 갈등이 심각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