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인동(仁同). 필명은 춘금여사(春琴女史), 일파(一波), 노노자(怒怒子) 등이다.
경상북도 경산에서 태어났다. 교육열이 높은 아버지 교육방침에 따라 1920년 대구여자공립보통학교에 들어가 6년 과정을 마친 후 1927년 대구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하지만 1927년 대구여고보의 일본인 배척 동맹휴학사건에 참여하였고, 1929년 광주학생운동에 동참하자는 격문을 써서 퇴학을 당하는 바람에 1929년 3월 서울 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로 편입하였다. 1931년 배화여고보 졸업과 동시에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학과에 입학하였으나 1932년 중퇴하였다.
같은 해인 1932년 이화여전 작문강사였던 이태준의 소개로 『개벽』사에 입사하여 『신여성』 편집기자로 일하면서 같은 해 8월 『제일선』에 단편 「저회(低徊)」를 발표하면서 등단하였다. 잡지사를 그만두고 보성전문학교와 와세다대학교를 나와 신간회 간부로 활동하였던 박명환(朴明煥)과 결혼하였다. 이후 「어미와 딸」, 「자장가」, 「한야월(寒夜月)」 등을 발표하였다. 『매일신보』에 연재소설 「은하수」를 1935년 연재하였고, 소설 외에도 희곡과 방송극을 쓰며 활동하였다. 또 일제강점기 전쟁 동원을 선동하는 작품을 저술하며 친일반민족행위를 하였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대구로 피난을 가서 『영남일보』 문화부장 겸 최초의 여성 종군기자 겸 육군소속 종군작가로 활약하였다. 1951년 『대구매일신보』로 자리를 옮겨 문화부장과 논설위원으로 다니다, 1953년 3월 이후 서울로 돌아온 후 『평화신문』 문화부장으로 이직해서 1950년대 중엽까지 다녔다.
신문연재소설을 통해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벽오동 심은 뜻은」, 「이조의 여인들」 등의 대중소설을 집필하였다. 120여 편의 단편소설, 90여 편의 장편소설을 남길 만큼 대표적인 다작 작가로서, 흥미 위주의 스토리 전개와 활달한 문체를 구사하였다. 1987년 10월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다. 70대 중반이던 1989년에도 14권에 달하는 대중소설 『고려왕조 5백년』을 출간하면서 노년까지 창작 활동에 몰두하였다. 2003년 2월 17일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