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횡천(橫川: 강원도 횡성군). 옛 이름은 윤해(尹諧)이다. 공신 윤신복(尹新福)의 6세 내손(內孫)이고 고려 태조의 6세 외손(外孫)이다. 외조 유설(庾說)은 태조공신 유금필(庾黔弼)의 후손이다.
어려서 고아가 되어 누이에게 의지하여 살았다. 1084년(선종 1) 남궁시(南宮試)에 합격하고, 1088년(선종 5)에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여 내시(內侍)에 속하였다. 이후 비서교서랑(秘書校書郞),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 영암군지사(靈嵒郡知事), 광주목(廣州牧) 수령 등을 거쳤다. 1122년(예종 17)에 예부시랑 보문각직학사 지제고(禮部侍郞 寶文閣直學士 知制誥)가 되었으며 이듬해 『정관정요(貞觀政要)』를 주석하여 인종에게 바쳤다. 1126년(인종 4)에 이자겸(李資謙)이 난을 일으켰을 때 궁궐의 화재를 진압하는데 공을 세웠다.
1133년(인종 11)에 고사(古詞) 300수를 골라 모아 『당송악장(唐宋樂章)』을 편찬하였다. 1146년(인종 24)에는 『대평광기촬요시 100수(大平廣記撮要詩 一百首)』를 만들어 왕에게 바쳤으며, 당 현장법사(玄裝法師)의 『서역기(西域記)』를 근거로 하여 『오천축국도(五天竺國圖)』를 지어 바치자 왕이 연사(燕糸) 일곱 묶음을 내려주었다. 윤포는 학문에 밝고 정치에 통달하는 한편으로 음률을 두루 알았다. 특히 가사(歌詞)를 잘 하였다. 만년에는 항상 불경을 읽으면서 직접 손으로 베낀 『법화경(法華經)』 한 축을 합문(閤門)의 양로연(養老宴)에 나아가 바치자 왕이 윤포에게 여러 하사품을 내려주기도 하였다.
벼슬이 검교대사 수사도 참지정사 주국(檢校大師 守司徒 參知政事 柱國)에 오른 뒤 1154년(의종 8)에 9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해에 의종이 열정공(烈靖公)이라는 시호를 추증했으며, 개경 동쪽 법운산(法雲山) 기슭에 장례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