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완산(完山). 증조는 충신공(忠愼公) 유신(柳伸)이고, 아버지는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에 추봉된 유영재(柳英材)이다. 어머니는 합문지후(閤門祗侯) 조시언(趙時彦)의 딸이다.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곽양선(郭陽宣)의 셋째 딸과 결혼하여 자녀를 여러 명 두었다.
어려서 남성시(南省試)에 합격한 뒤 음서(蔭敍)로 양온령동정(良醞令同正)직을 받아 관리가 되었다. 이후 영암군판관(靈巖郡判官), 남면도감판관(南面都監判官)을 거쳐 내시(內侍)에 속하였다.
1186년(명종 16)에는 금(金)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합문지후(閤門祗侯)가 되었다. 1198년(신종 1)에는 도지휘사(都指揮使)가 되어 금의 봉책사(封冊使) 일행 100여 명을 접대하였다. 도관낭중(都官郎中), 대부소경(大府少卿), 양광도안렴사(楊廣道按廉使), 호부시랑(戶部侍郞), 예빈경(禮賓卿), 추밀원 좌승지 지병부사(樞密院 左承旨 知兵部事) 등을 거쳐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使), 판예빈성사 지이부사(判禮賓省事 知吏部事)로 승진하였다.
1214년(고종 1)에는 추밀원부사 판합문사(樞密院副使 判閤門事), 이듬해에는 서경(西京)의 팔관재제사(八關齋祭使)가 되었다. 이후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오르고, 1218년(고종 5)에는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에 임명되었다. 병이 들자 수태보 개부의동삼사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 판병부사(守太保 開府儀同三司 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 判兵部事)로 은퇴하였다.
1221년(고종 8)에 60여 세로 사망하자, 시호를 대숙공(戴肅公)이라 추증하고, 봉황산(鳳凰山) 기슭에 장례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