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영릉은 1450년 6월 태종의 헌릉(獻陵) 서쪽 기슭에 조성되었다. 영릉신도비는 공조판서 정인지(鄭麟趾)와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 김조(金銚)가 왕명을 받들어 각각 비문과 비음기를 짓고 세종의 제3왕자인 안평대군(安平大君)이 글씨와 전액을 써서 1452년(문종 2) 2월 능상(陵上) 아래에 건립하였다. 3월에는 비각이 완성되었다. 1469년(예종 1) 3월 풍수상 불길하다는 이유로 영릉을 여주(驪州)로 천릉(遷陵)하고 7월에는 구(舊) 영릉에 남아 있던 신도비와 잡상(雜像)을 땅에 묻었다. 1974년 세종대왕기념사업회가 신도비를 발굴하여 세종대왕기념관으로 옮겼다.
영릉을 조성한 다음 해인 1451년 1월 안평대군 등이 영릉에 나아가 신도비의 역사(役事)를 살펴보았다. 6월에는 김조(金銚)가 세종대의 명신 명단이 포함된 비음기를 먼저 지어서 올렸고 뒤이어 7월에는 정인지가 비문을 지어서 바쳤다. 1452년 2월 비석소제조(碑石所提調) 정분(鄭苯) 등이 신도비를 세우고 와서 복명하자 왕이 격려하였다. 3월에 비각이 완성되자 감역관(監役官)과 입비상지관(立碑相地官) 이현로(李賢老) 등을 모두 한 품계씩 승진시켜 주었다. 입비상지관은 신도비 세울 땅을 살펴 선택하는 관직인데 처음에는 풍수학훈도(風水學訓導) 김윤선(金允善)이 맡았었다. 7월에는 비문을 실록각(實錄閣)과 전라도 · 충청도 · 경상도의 사고(史庫)에 보관하였다.
1469년 3월 영릉을 여주(驪州)로 천릉(遷陵)하고 7월에는 구(舊) 영릉에 남아 있던 신도비와 잡상(雜像)을 묻었다. 1691년(숙종 17) 윤7월 신도비의 모습 일부가 땅 위로 드러나자 도로 흙을 덮었다. 1738년(영조 14) 9월 연성수(蓮城守) 이근(李槿)이 신도비를 찾아 내어 옮겨 세우자고 상소하였다. 10월에 왕명으로 우의정 송인명(宋寅明) 등이 땅을 3척쯤 파서 찾아 냈으나 이미 글자가 거의 다 마모되어 그 자리에 다시 묻었다. 1974년 3월 세종대왕기념사업회가 백색 대리석 한 덩어리로 만들어진 비신과 이수를 발굴하였으나 귀부는 끝내 찾지 못하여 세종대왕기념관으로 옮겨 세울 때 자연석을 비신 받침돌로 삼았다. 1999년 2월 귀부를 새로 제작하여 그 위에 비신과 이수를 다시 세웠고 2004년 6월 비각을 건립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정인지가 지은 비문은 총 4,886여자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다. 조선 초기 찬란한 문화를 이룩하여 이른바 ‘세종성시(世宗盛時)’라 칭송되던 세종 재위 기간의 주요 업적을 연대순으로 정리하였다. 정인지는 글의 말미에 “이십여 년 동안 대왕을 가까이서 모셨는데 참으로 지극히 광대하시어 정미하셨고 또 매우 고명하시어 중용하셨으니 실로 동방의 요순(堯舜)이셨다.”라며 세종을 평생 모신 감회를 기록하였다. 비음기는 김조(金銚)가 세종대의 명신 명단을 포함해서 지어 바쳤다고 기록에 전하지만 글의 전문(全文)은 남아 있지 않다.
건원릉과 헌릉신도비가 귀부이수 양식이었던 만큼 영릉신도비도 전통을 계승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나 1974년 3월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옛 영릉 터를 발굴한 결과, 백색 대리석 한 덩어리를 다듬어 만든 비신과 이수만 발견하였을뿐 끝내 귀부는 찾지 못하였다.
이수 앞뒤에는 2마리의 용이 서로 마주보며 여의주를 다투는 쌍룡쟁주(雙龍爭珠)의 모습이 장식되어 있다. 중국 당나라 양식을 따른 건원릉과 헌릉신도비의 이수와는 다른 조선시대만의 고유한 양식이다. 조각 솜씨가 매우 정교하고 사실적이어서 생동감이 넘친다. 규모도 거대하여 이전의 왕릉신도비들을 압도한다. 건립 완료를 보고 받은 문종이 “신도비가 매우 커서 세우기가 매우 어려울 것 같아 자나깨나 걱정이었는데 이제 일을 무사히 마쳤다니 매우 기쁘다.”라고 언급할 정도로 어려운 역사(役事)였던 것이다. 영릉신도비의 비신과 이수 총 높이가 450㎝이고 건원릉신도비는 335㎝이며 헌릉신도비는 420㎝이니 그 크기를 가늠할 수 있다. 만약 귀부가 있었다면 총 높이가 약 600㎝에 이르렀을 것으로 판단된다. 조선시대 역대 왕릉신도비 중에서 제일 거대한 규모이다.
영릉신도비는 조선시대의 마지막 왕릉신도비다. 영릉신도비 이후로 왕릉신도비의 입석이 폐지되었기 때문이다. 역대 왕릉신도비 중에서 가장 큰 규모이고 조선시대의 고유한 양식이 반영된 최초의 왕릉신도비라는 점에서 가치가 매우 높다. 1471년(성종 2) 건립된 원각사비(圓覺寺碑)도 거의 동일한 양식을 갖추고 있어 주목된다.
오랜 세월 땅 속에 매몰되어 비신 표면이 한 겹 떨어져 나갔으나 다행히 비문 글씨 몇 자와 전액은 확인된다. 비문과 전액 글씨를 쓴 안평대군은 송설체(松雪體)에 능했던 조선 전기 사대명필(四大名筆) 중 한 명이다. 비록 완전하지는 않지만 조선 전기 서예사(書藝史)와 금석학(金石學) 연구의 귀중한 유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