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의 작품을 처음으로 묶어 낸 것은 『불나비』라는 제명의 시집이었다. 불교적인 주제를 드러내고 있거나, 1950년대 한국 현대시의 대체적인 특성이라 할 수 있는 모더니즘적 경향을 띠는 작품들 40여 편이 수록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시집은 신문에 출판광고까지 나갔지만, 인쇄소 화재로 소실되어 버리고 출간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사연으로 그의 첫 시집은 1960년이 되어서야 나오게 되는데 이것이『피안감성』이다.
고은은 6·25 전쟁 중 수없는 이웃의 죽음을 목도해야 했고 이때 겪은 충격으로 그의 의식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게 된다. 고은이 19세라는 어린 나이에 승려가 된 까닭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며, 전쟁 체험 후 각인된 이와 같은 의식의 상흔이나 비현실주의적 자세가 그의 첫 시집인『피안감성』의 경향을 결정짓는 지배적인 요인이 되었다.
『피안감성』의 작품들은 1970년대 이후에 보였던 현실주의적 성격과 구분되는 것으로서 삶에 대한 허무주의적 인식을 바탕으로 유미적이고 탐미적인 세계를 형상화하고 있다. 허무주의와 관련하여 고은은 그것이 본래 19세기 서구에서 발생한 것이지만 그 정신적 배경은 1950년대 전쟁을 겪은 후 폐허처럼 되어 버린 우리의 의식 상태와 흡사한 것이며, 또한 그것은 동양의 무위 사상과 유사한 것이라 말하고 있다.
초기시 중에서도 가장 앞에 자리하고 있는 작품 「폐결핵」이 이러한 허무주의적 정서와 더불어 죽음 의식 및 소멸과 상실의 과정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시에 해당된다. 이 시에서 고은은 누이와 함께 하는 세속적 공간에서의 긴장감을 효과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는데 이는 결국 생명, 성, 사랑과 같은 육체성의 범주에 드는 것은 모두 일시적이요, 영원한 것은 무(無)의 세계라는 허무의식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시집 『피안감성』의 가장 중심적인 상상력을 표상하는 것은 바로 시인의 이러한 무(無)에 대한 의지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