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문학자대회 ()

현대문학
의례·행사
조선문학가동맹 주관으로 1946년 2월 8일∼9일까지 서울 종로 기독청년회관에서 열린 ‘조선문학가동맹’의 문학행사.
정의
조선문학가동맹 주관으로 1946년 2월 8일∼9일까지 서울 종로 기독청년회관에서 열린 ‘조선문학가동맹’의 문학행사.
연원 및 변천

해방 직후 좌익 문학운동은 임화, 김남천, 이원조 등을 중심으로 하는 ‘조선문학건설본부’와 이기영, 한설야, 한효를 중심으로 하는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광범위한 민족통일전선의 수립이라는 당시의 절박했던 정치적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서 문화부분 조직 통일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당시 조선공산당은 양 단체의 문학론을 면밀히 검토한 결과, 조선문학건설본부 측의 운동노선 즉 과격한 투쟁의식이나 계급관념을 표면적으로 내세우기보다는 내부적 단결을 확고히 하는 운동방법이 당대 상황에서 전략적으로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두 단체는 조선문학건설본부 중심의 통합을 모색하게 된다.

1945년 12월 6일에 조선문학건설본부와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은 통합에 관한 성명서를 발표하고, 며칠 뒤인 13일에는 합동총회를 열어 ‘조선문학가동맹’이라는 새로운 조직을 출범시켰다. 그리고 이 총회에서 ‘전국문학자대회’를 위한 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대회 요강을 결정하게 된다. 그보다 앞서 12월 10일에는 한설야, 이기영, 김사량을 비롯한 북쪽 문인 19명이 삼팔선을 거쳐 내려와 서울에서 남쪽 문인들과 함께 관련 문제를 놓고 회동하기도 했다.

조선문학가동맹은 문인들의 전국적 집회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추인받고 더불어 문학이념을 보다 구체화하기 위한 의도에서 전국문학자대회를 세심하게 준비하였다. 대회준비위원회에서는 친일 부역행위가 명확히 드러나는 문인들을 제외한 233명의 문학자를 선정하여 단체 가맹 의사를 타진하는 통지서를 발송했다. 여기에 응한 문인은 120여 명에 이르렀다. 이런 과정을 통해 l946년 2월 8∼9일 양일간 제1회 전국문학자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는 좌익계열의 문인들뿐 아니라 중도파 문인들도 대거 참석했으며, 민족문학 건설을 문학운동의 기본노선으로 채택함으로써, 그 규모나 성격 면에서 우리 문단사상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행사내용

전국문학자대회는 1946년 2월 8일 오전 11시에 서울 종로의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첫째 날 행사가 시작되었다. 대회장에는 ‘조선민족문학수립만세’라는 대형 현수막이 걸렸고, 소련 총영사와 김원봉 및 이주하를 비롯하여 500∼1000여명의 인원이 자리를 가득 메웠다. 권환의 개회 선언 이후, 이태준이 중앙집행위원장 홍명희를 대리하여 「인사말씀」을 낭독했다. 뒤이어 경과보고와 각계의 축하 메시지들이 낭독되었고, 연합국에 대한 감사문 및 연합국 저명작가에게 보내는 메시지도 낭독되었다. 오후 일정은 박치우의 「국수주의의 파시즘화의 위기와 문학자의 임무」라는 제목의 특별보고로 시작되었다. 이후 임화의 「조선민족문학건설의 기본과제에 관한 일반보고」, 이태준의 「국어 재건과 문학가의 사명」, 김기림의 「우리 시의 방향」, 그리고 한효의 「조선 희곡의 현상과 금후 방향」이란 보고 연설이 이어졌다.

둘째 날에도 첫째 날 참석했던 대부분의 문학인들이 그대로 나왔다. 초청 임석자는 여운형, 김원봉, 김호 등 204명이나 되었다. 우선 여운형이 「근로인민과 함께 싸우는 문학」을 부탁하는 당부의 인사가 했으며, 재미한족연합회 대표인 김호(金乎)의 축하인사는 객석의 큰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이태준의 제의로 일제 치하에서 고인이 된 나도향, 김소월, 최서해, 이익상, 이효석, 심훈 등 27명의 작가를 추도하는 묵념을 갖은 후, 각종 보고가 이어졌다. 이원조의 「조선 문학 비평에 관한 보고」, 신남철의 「민주주의와 휴머니즘」이 특수 보고의 명목으로 이루어졌고, 그 뒤 임화에 의한 「조선 소설에 관한 보고」가 오전 일정 마지막으로 이어졌다. 오후에는 권환의 「조선 농민문학의 기본 방향」, 김남천의 「새로운 창작방법에 관하여」라는 보고연설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시간 관계상 박세영의 「조선 아동문학의 현상과 금후의 방향」, 김태준의 「문학유산의 정당한 계승 방법」, 김영건의 「세계문학의 과거와 장래의 동향」, 김오성의 「계몽운동의 전개와 신인의 육성」은 원고를 수록 열람하기도 했다.

이후, 강령과 규약을 심의 제정하는 순서가 이어졌다. 이때 만들어진 강령은 1) 일본제국주의 잔제의 소탕, 2) 봉건주의 잔재의 청산, 3) 국수주의의 배격, 4) 진보적 민족문학의 건설, 5) 조선문학의 국제문학과의 제휴 등의 5개 항목으로 구성되었다. 규약에서는 강령의 실현을 위한 각종 활동 사업, 예컨대 문학에 의한 민주주의 정신의 앙양, 문학에 의한 과학적 계몽운동, 문학의 인민적 기초의 확립을 위한 대중활동, 조선 근대 작품의 소개 및 비판적 연구 등의 활동이 열거되었다. 이러한 사업 내용은 대체로 조선공산당의 문화정책에 관한 공식 입장인 「조선민족문화건설의 기본 노선」을 따른 것이었다.

의의와 평가

전국문학자대회는 조선문학가동맹의 전국적 창립 대회의 성격을 띠며, 동시에 범문단적인 문화통일전선을 구축하기 위한 절차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신탁통치를 둘러싼 좌우대립의 분열 속에서 이같은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범좌익의 연합전선의 결성과 관련해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따라서 전국문학자대회의 의의는 단순히 분열된 좌익문단의 통합과 결속에 국한되지 않고,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의 일환으로 파악될 필요가 있다.

참고문헌

「홍명희와 해방 직후 진보적 문화운동」(강영주, 『역사비평』40, 1997)
「전국문학자대회의 성격과 의의」(이우용, 『건국국문학』 15·16합집, 1991)
집필자
장노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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