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1930년대에 활동했던 여류 서화가로서 서예와 사군자에 뛰어났다.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여성서화가로서 호(號)는 혜연(惠淵)이다. 1899년 서울의 부호 방효원(方孝原)의 차녀로 출생하였다. 숙명여고를 졸업한 뒤 1918년경 서화연구회에 들어가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의 지도를 받으며 서예와 사군자를 익혔다. 의학박사인 이갑수(李甲洙)와 결혼하여 3남 3녀를 두었는데, 당시로서는 드문 여류서화가이면서 육아에도 능통한 여성으로 언론의 관심을 받았다.
1921년 4월 18일 신알배터(申謁琲攄)⋅손정규(孫貞圭)⋅성의경(成義敬)⋅임영신(任永信)과 함께 여성의 문화향상을 촉진하고 생활제도를 개선하기 위한 여성단체로 조선여자청년회(朝鮮女子靑年會)를 조직하였다. 1922년 여성만을 교육하는 서화교육기관인 창신서화연구회가 조직되자 부회장을 역임하였으며, 1923년 4월 1일에는 규수서화연구회(閨秀書畵硏究會)를 조직하고 부회장으로 활동하였다.
글씨는 행서(行書)⋅초서(草書)⋅예서(隸書)를 잘 썼고, 그림은 사군자를 잘 그렸는데, 특히 난죽(蘭竹)에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 1922년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예서(隸書)」, 「초서(草書)」가 입선하고 이듬해 「예서(隸書)」로 입선한 것을 비롯하여, 수차례 서예와 사군자로 입선하면서 주목을 받았다. 1922년에는 금강산의 사찰에 대자를 써주고 이것을 석벽에 새기도록 했다고 하는데, 금강산의 유점사(楡岾寺) 효운동(曉雲洞)의 석벽(石壁)에 ‘五十三佛(오십삼불)’의 대자(大字)가 전한다.
1936년 젊은 나이로 사망하여 전하는 작품이 많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