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정읍 출신의 서예가로 12세에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고 수차례 특선을 하면서 천재 여류서예가로 주목을 받았다. 불심(佛心)이 깊어 백양사, 금산사, 내장사 등 여러 사찰의 편액에 글씨를 남겼다.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정읍 출신의 여류서예가로 호는 불하(不瑕), 불하자(不瑕子), 몽연(夢蓮), 몽연여사(夢蓮女史), 몽연산인(夢蓮山人)이다.
1912년 정읍 태인면의 거부(巨富)인 가산(迦山)김수곤(金水坤)의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7세에 서당을 다니기 시작하여 9세에 『맹자』를 익혔다. 그의 집안에는 이당(以堂)김은호(金殷鎬), 성당(惺堂)김돈희(金敦熙) 등 당대의 유명한 서화가들이 드나들었는데, 9세부터 부친의 권유로 김돈희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서예를 익혔다. 김진민은 고법(古法)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자신의 독창적인 서풍(書風)이 나와야 한다는 김돈희의 영향을 받아, 처음에는 왕희지(王羲之) 법첩(法帖)과 안진경(顔眞卿), 황정견(黃庭堅) 등의 서첩(書帖)을 공부하였고 나아가 금석문(金石文)을 익힌 후 장천비(張遷碑)와 조전비(曹全碑) 등의 한예(漢隸)를 집중적으로 공부하였다.
11세부터 전남 영광의 불갑사의 「불갑사(佛甲寺)」와 백양사의 「우화루(雨花樓)」 등의 현판 글씨를 쓰면서 소녀서예가로 이름을 날렸다. 12세에는 조부 김기섭의 묘비명을 썼고, 같은 해 제3회 조선미술전람회에 「당시(唐詩)」를 행서(行書)로 출품하여 조선미술전람회에 사상 최연소로 입선하면서 서예가로서 입지를 굳혔다. 김진민은 이 때부터 서예부가 폐지되는 1931년 10회 조선미술전람회까지 총 16점의 작품을 출품하였고, 그 가운데 「유란부(幽蘭賦)」(1926년), 「독서락(讀書樂)」(1927년), 「누실명(陋室銘)」(1929년), 「연인군화(燕人群花)」(1930년), 「난정집자(蘭亭集字)」(1931년)의 5점이 특선을 차지하는 등 입선과 특선을 거듭하였다.
김진민은 금강산 유점사 53불을 비롯하여 금산사, 법주사, 관촉사 등 전국의 유명사찰에 불사(佛事)를 하였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많은 사찰에 편액(扁額)과 비명(碑銘)을 남겼다. 11세인 1923년에 쓴 전남 백양사의 「우화루(雨花樓)」 편액을 비롯하여, 1935년경에 쓴 금산사 미륵전의 「대자보전(大慈寶殿)」 편액, 내장사 부도전의 「학명선사사리탑명(鶴鳴禪師舍利塔銘)」 등이 전한다.
17세에 서울 휘문중, 경동고 체육교사를 지낸 이진형(李珍亨, 1904∼1990)과 결혼하였다. 이 무렵부터 불하(不瑕), 또는 불하자(不瑕子)로 쓰던 호를 몽연(夢蓮)으로 바꾸었다. 김진민은 결혼 후 12남매를 두어 양육에 몰두하면서 수행의 방편으로 사경(寫經) 작업에 열중하기도 하였으나 30세 이후에는 가사와 건강상의 이유로 붓을 놓았다.
김진민은 행서⋅해서⋅예서⋅초서 등 다양한 서체를 구사하였고, 안진경과 황정견의 서체(書體)를 선호한 김돈희의 영향을 받아 여류작가임에도 불구하고 강건하고 웅대한 서풍(書風)을 구사하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현재 전하는 묵서(墨書)로는 「난정서(蘭亭序)」(1925년), 「서보절록(書譜節錄)」(1926년), 「낙지론10곡병(樂志論十曲屛)」(1933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