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 문노(文奴)의 문하생이며 승려 출신이었다. 전밀(轉密)은 동문인 김흠운(金欽運)이 전사자에 대해 격동하는 모습을 보고 “이 사람이 만약 전쟁에 나가면 반드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고 말하였다. 과연 김흠운은 655년(무열왕 2) 조천성(助川城)전투에서 앞장서서 싸우다 전사하였다. 이에 신라 사람들이 양산가(陽山歌)를 지어 애도하였다고 하는데, 아마 향가(鄕歌)는 주로 승려 계층에 의해 지어졌을 것이다.
전밀과 같은 승려들도 화랑의 구성원에 포함되어 있었다. 원광(圓光)의 세속오계(世俗五戒)나 양산가에서 드러나듯이 승려들은 화랑 및 낭도에게 정신적이고 지적인 도움을 주었다. 전밀은 임전무퇴(臨戰無退)를 강조하는 세속오계를 따르고 전장(戰場)에서의 살생을 묵인하는『범망경(梵網經)』을 신봉하던 호국적 성향의 승려였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