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 사회를 대표하는 역사학자로, 소련이 해체되면서 우리나라에 알려졌다. 주로 제정러시아 시기의 한러관계사를 공부하였으며, 극동 지역의 한인 독립운동 연구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1931년 1월 4일에 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k)에서 노동자였던 박등년과 최영애의 4남매 중에 차남으로 태어났다. 6세 때에 가족과 함께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강제 이주를 당했는데, 아버지는 정치 탄압의 희생자로 찍혀 이주 직전에 소련 당국에 체포되어 뒤에 처형되었다.
가족과 함께 이주한 곳은 러시아의 아스트라한(Astrakhan)이었지만,카자흐공화국의 구리예프(Guriev)로 다시 이주되었으며, 그 뒤에도 우즈베크공화국 하(下)치르치크(Chirchiq)의 동(東)파르티잔(partisan) 콜호즈(kolkhoz)로 옮기게 되었다. 그는 하치르치크에서 10년제 학교인 쉬콜라를 졸업한 뒤, 잠시 주변의 콜호즈 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51년에는 타쉬켄트에 자리한 중앙아시아 국립대학교에 입학하여 역사학을 전공하였고, 1956년에 졸업하고서 북극성(北極星)콜호즈 제59번 학교에서 역사 교사로 근무하다가 2년 뒤에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북극성콜호즈를 이끌고 있던 김병화를 만났다. 1962년에는 모스크바로 유학을 떠나 3년 동안 대학원에 다니면서 학자의 길을 본격적으로 걷기 시작하였다. 이 때 그는 한국 독립운동사를 주로 공부하였다.
박 보리스 드미트리예비치는 대학원에서 박사취득 자격인 칸디다트를 받은 뒤에 이르쿠츠크(Irkutsk) 국립사범대학교 역사학과 교수로 발령받았다. 당시 이르쿠츠크에는 아무런 연고가 없었지만, 대학원 입학 때 학위 취득 후에 시베리아에서 근무하여야 한다는 조건을 받아 들였기 때문이었다. 1999년에 모스크바로 옮길 때까지 25년 동안 이르쿠츠크에서 생활하면서 한러관계사 연구를 꾸준히 진행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박사학위인 독토르를 취득하였고, 소련 최고의 한국학 전문가로 인정받았다. 모스크바에서 그는 러시아국립학술원에 속한 동양학연구원에서 연구 활동을 계속 진행하면서 한국과 인연을 맺었지만, 2010년 12월 24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연구는 현재 딸인 박 벨라 보리소브나 박사가 이어서 진행하고 있다.
『러시아와 한국』(1979),『소련과 한국』(1988) 등을 포함하여 약 130편의 저서와 논문을 저술하였다. 특히 한러관계, 고려인 문제, 한국 독립운동사 등을 다루었는데, 만년에는 안중근(安重根) 등 한국 독립운동가에 관심을 가져서 한국에 여러 차례 학술 방문을 하였다. 1992년~1993년에는 이르쿠츠크 키로프(Kirov)구(區)의 교육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하였지만, 1991년에 소련 우호 훈장을 받은 뒤 러시아공화국 공훈학자로 연구와 교육에 전념하였다. 러시아인문학술원 정회원과 동시베리아 고려인협회 명예회장 등을 역임하였다.